나의 빈틈, 그곳에 가장 먼저 비가 내립니다

1월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채워짐의 미학

by 박혜원

01. 비어있는 칸이 주는 서늘함


1월의 달력을 한 장 넘기기 직전, 우리는 습관적으로 다이어리의 빈칸을 훑어봅니다. 빼곡하게 적어 내려갔던 새해의 다짐 중 선명하게 줄을 그어 지워낸 것보다, 여전히 하얗게 남아있는 빈칸들이 더 크게 다가오곤 하죠.

"올해도 결국 이렇게 빈틈투성이로 시작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집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로 완벽하게 채워진 삶을 '성공'이라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그 비어있는 공간이 사실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복된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02. 이집트의 땅, 가나안의 땅


인류의 오래된 지혜가 담긴 기록 속에는 두 가지 땅의 풍경이 나옵니다. 하나는 내 힘으로 강물을 끌어올려 쉼 없이 물을 대야만 살 수 있는 '이집트의 땅'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흡수해야만 생명을 틔울 수 있는 '가나안의 땅'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꾸만 이집트의 땅을 꿈꿉니다. 내 노력과 계획으로 삶의 모든 갈증을 해결하려 애쓰죠. 하지만 스스로 물을 대는 삶은 늘 피로합니다. 반면, 하늘의 비를 기다려야만 하는 땅은 역설적으로 가장 세밀한 돌봄을 받는 곳이 됩니다. 내가 물을 대지 않아도, 하늘이 그 빈틈을 알고 비를 내려주기 때문입니다.


03. 골짜기에 고이는 은혜


인생이라는 지형에는 높은 산도 있고 깊은 골짜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산 정상의 화려함을 갈망하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풍성하게 물이 고이는 곳은 낮은 골짜기입니다.


우리가 '빈틈'이라 부르고 '결핍'이라 밀어냈던 그 낮은 자리들이 사실은 은혜가 머무는 저수지였습니다. 스스로를 채울 수 없기에 비로소 채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셈입니다. 1월의 계획표에 남겨진 빈칸들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앞으로 채워질 축복의 용량일지도 모릅니다.


04. 연초부터 연말까지 거두지 않는 시선


우리를 가장 평안하게 하는 약속은, 우리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연초부터 연말까지 단 한 번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월 1일의 설렘 속에서도, 그리고 이제 막 다가올 2월 구정 명절의 분주함 속에서도 그 시선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훑고 있습니다.


내가 미처 채우지 못한 빈 공간, 실수로 만들어버린 틈새들. 그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살피는 세밀한 손길이 있음을 신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은혜에는 빈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비어있다고 느끼는 그 찰나조차, 사실은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05. 다시, 비워진 채로 걷습니다

이제 곧 2월이 시작됩니다. 명절을 앞두고 누군가는 가족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누군가는 오히려 더 깊은 외로움의 빈틈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당신의 빈틈은 더 큰 사랑이 고일 자리입니다. 1월을 마무리하며 마음의 빈칸을 억지로 채우려 애쓰지 마세요. 대신 그 빈 곳에 이렇게 적어두시길 바랍니다.


"이곳은 지금, 가장 세밀한 은혜가 스며들고 있는 중입니다."


글 너머의 진심을 영상으로 전합니다.


"3년 전 새해 첫날, 떨리는 마음으로 전했던 이 메시지가 오늘 다시 제 마음을 두드립니다. 글로 다 담아내지 못한 그날의 공기와 간절한 고백이, 1월의 마지막 자락을 지나는 여러분의 삶에도 따뜻한 위로로 가닿기를 소망합니다."

(유튜브 영상 삽입: https://youtu.be/ElDTXvKEL8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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