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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호 Sep 03. 2024

개미골목 우리집

1987년의 시작

이 이야기는 1986년에 시작된다. 엄마아빠는 주말은 물론 명절에도 쉬지 않고, 중학교앞에서 문방구를 해서 몇 년 만에 서울의 구석진 동네에 ‘자가’주택을 마련했다. 그게 1986년이었다. 자가라고는 해도 은행빚으로 산, 아직 은행의 몫이 더 많은 집이었다. 이미 손 쓸 수 없는 단계에 발견된 아빠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엄마아빠는 문방구를 정리하고 비로소 본인들을 쉬지 못하게 몰아붙였던 이 집에 살게 되었다. 이사하던 날 문방구 안채의 주인집 아줌마와 엄마가 인사를 하다가 끌어안고 엉엉 울었던 장면만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우리 집은 개미골목에 있었다. 이름값을 하는 동네였다. 어른 한 명이 지나가기에도 어깨가 끼일 듯 좁은 골목이 개미굴처럼 이어졌다. 골목을 이루고 있는 시멘트담에는 동그라미 혹은 동그라미에 엑스표시의 단순한 무늬에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있었다. 개미굴 세 개가 마주치는 개중에는 꽤 넓은 곳에 우리 집이 있었다. 구석구석 녹슨 짙은 남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멘트로 발라버린 집 크기에 비해 좁지 않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는 수돗가도 있었다. 대문 바로 앞의 안채로 들어가는 현관은 꽤 번듯했다. 대문 왼쪽으로는 개미골목보다 더 좁은 통로가 하나 있었고, 그 좁은 통로를 통해 문간방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그 문간방에 살았다. 우리는 세를 살 때도 문간방에 살고, 우리 집에 살 때도 문간방에 산다는 게 나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문간방에 살도록 정해진 건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 집으로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나와 언니를 걸어서 십분 거리의 큰 고모네에 보냈다. 엄마가 막내를 업고 혼자서 우리까지 돌보기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고모네서는 왠지 불안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도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고모에게 우리가 왜 여기서 지내야 하냐고 물었지만 신통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결같이 살갑지 않은 고모가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랬다. 나는 안 듣는 척 고모와 고모부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였다. 고모집에서의 생활은 길게 가지 않았다. 고모집에서 두 밤을 자고 일어난 날이었던가, 고모는 방을 닦다가 갑자기 눈물을 훔쳤다. 내가 ‘고모 왜 울어?'하고 물었는데, 고모는 니네 어떻게 살래라는 뚱딴지같은 대답을 했다.


그날 오후 늦게 고모는 언니와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개미골목집에 가서 엄마에게 뭔가를 전해주라는 거였다. 엄마를 보러 간다니 마음이 놓였다. 아픈 아빠와 돌도 안된 아기 동생 뒤편에서 언니와 나는 영영 엄마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설렌 마음으로 길을 나선 나는 아직도 그 동네 길을 찾을 자신이 없어서 잰걸음으로 언니를 쫓아 걸었다. 목공소인 고모집에서 나와 큰길을 따라 서울은행 앞 사거리에서 차들이 정신없이 달리는 4차선 신호등을 건넜다. 이행우 의원을 지나 개천다리를 건너 개미굴로 들어섰다.


한참을 벌집 같은 개미굴을 지나 해가 지기 직전 어스름한 저녁에 마침내 개미굴 세 개가 만나는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집 앞에는 낯선 노란 등이 걸려있었다. 간혹 다른 집에도 걸려있던 걸 본 적이 있던 주름지고 큰 등이었다. 한문으로 뭐라고 쓰여있었다. 달이 빛나듯 그 노란 등이 따뜻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집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럴 이유는 없었지만, 엄마가 우리를 보면 화를 낼 것 같았다. 우연히 잠시 밖으로 나왔던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엄마는 우리를 보고 놀란 듯했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다만 빨리 고모네로 가라고 우리를 다그쳤다. 여전히 동생을 업은 채였다.


그 길로 고모집에 돌아온 우리는 거기서 이틀을 더 보내고 우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 앞의 노란 등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아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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