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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호 Sep 16. 2024

엄마의 첫 수입

1987년 3월

국민학교 생활은 특별할 게 없었다. 한글을 떼고 가서인지 매일 ㄱ, ㄴ그리다 오는 것이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건성건성한 학교생활을 보여주듯 받아쓰기는 자주 틀렸다. 백점에 익숙한 엄마를 위해서, 두개쯤 틀린 날은 하교길에 받아쓰기 노트의 80점짜리 페이지를 쭉 찢어서 되도록 집에서 먼 남의 집 담벼락 쓰레기통에 던져놓았다. 덕분에 짝을 잃은 맨뒷장은 너덜너덜 밖으로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막상 엄마는 내 받아쓰기에 관심줄 시간이 없었다. 엄마는 그때 돌도 안 된 동생을 업고, 돈을 벌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배운 것도 없고 경력도 없고 돌 안된 아이를 업은 엄마에게 세상이 만만하게 돈 될만한 일을 내줄리가 없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외면했을 법한 돈 안되고 힘든 일들을 부지런히 찾아왔다. 


엄마가 찾은 첫 번째 일은 마늘 까기였다. 학교에 가려는데 마당에 나와 언니도 함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빨간 고무 다라이가 나와있다. 빈 통도 아니고, 마늘을 한가득 담고서. 학교 가는 길에 뭐냐고 물으니, 엄마는 이걸 다 까면 이천 원을 받는다고, 벌써 마늘을 다 깐 사람처럼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가 뭐라도 일을 구하러 가려면 신발이 필요했는데, 엄마에게는 파란색 불투명하고 못생긴 슬리퍼뿐이었다. 엄마는 먼저 마늘을 까서 이천 원을 벌고 그걸로 신발을 사겠다는 제법 실행가능한 계획을 세웠단다. 


나는 엄마가 돈을 벌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엄마가 든든했다. 학교를 가면서 새삼 신이 났다. 신난 나의 기분은 하교 후까지 이어졌다. 학교에서 개미골목 우리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20분 남짓. 나는 신발주머니를 신나게 빙빙 돌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그 사이 손톱밑이 까매지도록 열심히 마늘을 깠나 보다. 큰 다라이의 한쪽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뽀얗게 껍질이 잘 까진 마늘 다라이는 그만큼 채워져 있었다. 


엄마를 도우려고 문간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던져 넣고, 신주머니도 얼른 던져놓았다. 그 때, 눈치 없는 신주머니에서 실내화 한 짝이 튀어나왔다. 실내화를 다시 넣으려는데, 신주머니에 있어야 할 실내화 한 짝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깊지도 않은 신주머니에 손을 넣어 훑어보고, 있을 리 없는 책가방도 뒤졌다. 그래도 실내화는 없었다. 다시 신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짝 잃은 실내화 한 짝만 굴러 떨어질 뿐이다. 머뭇거리다 마당으로 나와서 엄마에게 실내화 한 짝이 없다고 말하자, 엄마는 난감한 표정으로 내가 아까 했던 것처럼 실내화 가방과 가방을 찬찬히 다시 뒤졌다. 물론 허사였다. 나는 무서웠다. 새 실내화를 잃어버리다니.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어느 길로 왔느냐고 물어, 내가 갔던 길을 찬찬히 다시 걸어갔다. 엄마와 손을 잡고 오랜만에 걸었다. 엄마 손을 잡고 둘이 걷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그래도 눈치가 있어서 이게 마냥 기쁠 수는 없었다. 실내화를 찾고자 바닥을 눈으로 훑으며 어느덧 학교 앞까지 갔지만 실내화는 없었다. 걸어가는 길에 나는 실내화 가방을 돌리면서 집에 왔노라고 고백했다. 엄마는 어이없게 웃었다. 학교 앞까지 가도 실내화는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실내화 한 짝을 누가 집어간 걸까? 나처럼 한 짝을 잃어버린 아이인가? 


결국 학교 앞 문방구에서 천 팔백 원인가 하던 새 실내화를 사서 돌아왔다. 엄마는 여전히 못생긴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아이고, 신발하나 사볼랬더니.” 한숨을 쉰 엄마는 여전히 바쁘게 걷는 채로 고개만 돌려 나를 보고 빽 소리를 질렀다. “이제 신주머니 돌리고 다니지 마!” 엄마의 잔소리에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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