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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호 Sep 09. 2024

아빠없는 시작

1987년 2월

그 주의 일요일 아침, 엄마는 조용히 언니와 나를 깨웠다. 엄마의 얼굴만 봐도 한참 울고 난 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의 말투도 평소와 달랐다. 화도 짜증도 묻어나지 않는 엄마의 목소리에 슬픔이 선명했다. “사실은 아빠는 돌아가셨어. 이제는 우리끼리 잘 살아야 해. 엄마가 잘 키워줄게. 애들한테는 아빠 미국 가셨다고 하면 돼. 기죽지 말고 우리 잘살자.” 엄마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울먹였고, 그 울먹임은 언니와 나를 울렸다. 아직도 이불을 덮은 채로 주말아침 나는 이불로 떨어지는 내 눈물을 보면서 엉엉 울었다. 며칠 동안 아빠가 시골에 가셨다는 엄마말을 나는 정말 믿었던가 보다.


나의 울음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우리 집은 그날부터 슬픔에 잡아먹혔다. 그날 나는 아빠가 없다는 게 실감 나지 않으면서도 막연히 이제 웃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민학교 입학을 일주일쯤 앞둔 날이었다. 언니는 삼 학년이 막 될 참이었고, 민수는 아직 돌도 되지 않은 아기였다.


얼마 후, 나는 작은 고모, 고모부, 엄마와 함께 택시를 타고 63 빌딩을 갔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2월이어서 아직은 찬바람이 불었다. 물론 돌도 안된 민수도 함께였다. 빨간 포대기를 한 엄마에게 폭 쌓인 채. 말로만 듣던 63 빌딩은 전체가 금색으로 위풍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듯 높은 꼭대기 근처는 태양을 받아 눈이 부셔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나는 왜 왔는지 몰랐지만 광고에서 보았던 그 수족관을 떠올렸다. 수족관에 온 거라면 고모, 고모부와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웃으면 안 되겠다던 나의 다짐과 달리 나는 조금 설렜다. 안내양이 있는 63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안내양 언니는 인형처럼 웃으면서 녹음기에 튼 것 같은 말투로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말해주었다. 태엽인형 같은 손동작도 함께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의외로 은행 같은 사무실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조금 기다렸다. 내가 잘 알 수 없는 엄마의 볼일은 금방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몰래 들으며 우리가 아빠의 사망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그곳을 갔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엄마아빠가 중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던 시절, 엄마아빠는 보험을 들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하나 들어주었던 나의 교육보험에는 혜택을 받게 될 줄 몰랐던 조항이 하나 있었다. 보호자의 사망. 그날 우리는 아빠의 보험금 이천만 원을 받아서 고모, 고모부와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갈 때처럼 올 때도 엄마가 택시비를 냈다.




이 후로 초등학교 4학년 소풍 때, 그리고 어른이 되어 뷔페 갈 때 63 빌딩에 갔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아빠의 보험금을 타러 처음 63 빌딩을 갔던 그날, 택시에서 내릴 때 뺨에 스치던 찬바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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