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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Aug 12. 2024

기다림

별이 지면 이내 해가 뜨고 저녁노을이 가고 이내 별이 뜨는 오뉴월의 하루는 대체 얼마나 긴 것일까?

여자가 한(恨)을 품고서야 서리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오뉴월의 땡볕은 또 대체 얼마나 뜨거울까?


나는 그렇게 긴 하루의 해를 품은 오뉴월에 태어났다.

나는 온 천지를 전부 녹일 듯 뜨거운 오뉴월에 태어났다.


내 생일은 음력 6월 16일이다.

매년 내 생일을 앞 뒤로 초복, 중복이 포진을 하고 있고, 자주 1년 중 가장 덥다는 대서(大暑)가 뜨거운 혀를 날름거리며 내 생일을 축하해 주곤 하였다.


새끼오리는 태어나 맨 처음 본 것을 자신의 어미라 여기며 평생을 살아간다고 하는데 나는 태어나 처음 느끼고 본 길고 무더운 날씨가 온통 세상의 날씨인 줄 알고 살아왔다.

뜨거운 날씨와 낮의 길이에 익숙해하고 그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지금과 같이 덥다 못해 뜨거운 날씨에 익숙해져 어느 순간 이제 여름이 간다는 말이 들릴 때면 늘 나와 함께 하던 사랑하는 님이 내 곁을 떠난다는 말로 들려 서운하기까지 하다.

 

매년 올 들어 처음 듣는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릴 때면 그 소리가 재난속보 사이렌소리로 들리고, 이제 아침과 저녁으로 선선해진다는 뉴스앵커의 트는 내가 어제 산 주식의 주가(株價)가 50% 넘게 폭락하였다는 천둥의 소리로 들린다.

 

그때쯤에서 나는 자주 같은 꿈을 꾸기도 한다. (아니다, 거의 매년 그때쯤 그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여름꽃들이 만개해 있고 사방에 매미소리가 가득한 여름의 한가운데쯤에서 산책길을 나서 내가 좋아하는 여름을 만끽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고 그 눈발에 여름꽃들이 지고 매미소리들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거 큰일이다.

내가 싫어하는 겨울이 벌써 왔나 보네.

무슨 겨울이 가을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오지?'


꿈속에서 중얼거리다 잠에서 깨어난다.


꿈에서 깨어난 현실은 다행히 아직은 늦여름이고 소리의 힘참은 한 여름의 그것보다 조금은 덜하지만 곳곳에서 아직 매미울음소리가 들린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내 입에서 긴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일 년 사계절 중에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

반대로 사계절 중에 겨울을 가장 싫어한다.

나는 좋아하는 여름을 맞이하는 봄을 두 번째로 좋아한다.

반대로 내가 싫어하는 겨울을 맞이하는 가을을 두 번째로 싫어한다.


매년 나는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학수고대로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사방에서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대는 2월부터 나는 집 앞 산책길에 서있는 키 작은 매화나무에서 매화꽃을 찾았다.

2월 4일이 입춘이라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다.

어떤 때 나는 얼마 전 매화나무에 내려 아직 녹지 않은 작은 눈송이가 매화로 보여 그곳까지 뛰어서 간 적도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을 보고 나비가 나풀대는 것 같아 뛰어서 간 적도 있었다.


그러다 정말 나무에서 앙증맞은 매화를 본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르고 만세를 부르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다 정말 나풀거리는 것이 낙엽이 아닌 나비가 맞았을 때 나는 쾌재를 부르며 나비를 따라다녔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아직 만개하지도 않은 작은 꽃 한 송이에서 나는 기적을 보고 느낀다.

아직 날 기운조차 없이 억지로 세상에 태어난 나비 한 마리를 보고도 감사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내가 봄을 기다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봄이 와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이 온다는 이유에서이다.


버스가 와야 내가 애타게 기다리던 사랑하는 님이 오시듯이 봄이 와야 여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봄은 정류장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한 알록달록 예쁜 버스처럼 알록달록 예쁘게 매년 나를 찾아왔다.

'이제 곧 내가 떠나면 이내 네가 좋아하는 여름이 올 거야'라고 속삭이면서...........


그렇지만 봄은 늘 따스함만 데리고 다니지는 않았다.

자주 계절이 거꾸로 가나 싶을 만큼 매서운 추위를 데리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나와 같이 봄을 기다리던 사람 몇몇은 기어이 그 매서운 추위 이름 앞에 "꽃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추위를 녹였다.


그렇게 봄은 추위 속에서도 개나리를 내어주고 진달래를 내어주고 벚꽃까지 내어주며 사람들과 밀당을 하면서 어느새 여름이라는 선물하나를 툭 던지고 이내 먼지를 일으키며 정류장을 떠나 버렸다.


봄 버스가 떠나고 이내 파란색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여름이다.


딱 61년 전 내가 태어났던 그때의 여름이다.


여름은 늘 분주하다.

살아있는 생명체들 전부가 땅을 기어서 가고, 물가를 헤엄치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소리를 지르며 나의 계절 여름을 축복한다.


사람들의 행동들은 겨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겨울의 칼바람을 피해 종종걸음을 걷던 바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천천히 부채질을 하면서 걷는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지고 거의 집에만 있던 겨울의 사람들과 달리 계곡에 발을 담그고 다리 그늘에 자리를 깔고 누워 만만디(慢慢地)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보니 내가 여름을 기다리고 좋아하는 진짜 이유도 따로 있었다.


내가 네 살 때 나는 양가(養家)로 입양되어 갔다.

생부(生父)와 양부(養父)는 4촌 지간이셨고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였지만 입양되어 간 그곳은 첩첩산중의 산골이었다.


그곳은 전기와 수도가 없는 것을 물론이고 하루에 세 번 낡은 버스가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차도로 마을에서 읍내로, 읍내에서 마을로 오갔다.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아 6.25 사변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되신 가엾은 내 양모(養母)께 자식이 있을 리 만무하였고 가문의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나는 지금까지 기억나지 않는 어린 나이에 어느 하루 졸지에 대도시에서 첩첩산중으로 내 삶의 터전을 바꾸어야만 했다.

당연히 형제도 자매도 내게는 없었다.


철이 들어가면서 나는 늘 외로웠고 형제가 있는 다른 친구들이 늘 내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낮에 같이 놀던 친구들과 헤어져 밤에 들어간 집에는 수염이 당신 가슴까지 내려자란 할배와 쪽머리에 은비녀를 한 이(齒)가 하나밖에 없었던 할매가 자주 서로의 방에서 으르렁 거리며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하고 계셨다.

나는 늘 할배, 할매가 크게 다투실까 노심초사하며 어린 가슴을 태웠다.


내가 기거(起居)하던 방에는 할배와 각방을 쓴 지 오래되신 할매와, 할배, 할매의 아픈 손가락이셨던 키 작은 고모가 계셨고 일찍 홀로 된 몸으로 시부모와 시누이를 건사해야 했던 가엾은 엄마가 계셨다.


이 네 분 어른들은 애당초 나와는 대화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내일 내가 가지고 놀 장난감 총과 때기(딱지)에 관심이 있었지만 어른들은 벼수매와 콩작황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내일 사 먹을 야물고 달콤한 돌사탕에 관심이 있었지만 어른들은 내일 당장 내가 가지고 학교에 가야 할 기성회비에 걱정이 태산이셨다.


어린 나는 여러 번의 경험으로 나와 어른들은 재미있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집에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할매는 하나밖에 없는 이를 나에게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우리 열이는 집안 장손답게 말이 없고 과묵하네.

미덥고 귀한 내 강아지"


서산으로 진 해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던 초저녁~

마을 뒷산에서 이른 소쩍새가 구슬프게 울어대고 캄캄한 마당 한가운데로 반딧불 무리들이 떼로 날아다닐 때쯤~

 

 집 친구 기덕이가 동생과 싸우다가 어머니께 혼나는 소리가 담 넘어 우리 집까지 들려왔다.

절간 같았던 집에서 묵언수행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기덕이 집처럼 시끄럽게 다투고 사람 사는 곳 같은 집이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동생들을 성가셔하는 친구들의 불만이 내게는 사치로 보이고 들렸다.


그랬던 내게도 일 년에 딱 한번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고 동경하였던 형제가 생기는 날들이 있었다.


그날은 바로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매년 그때쯤 생부(生父)께서 두 남동생들을 데리고 대구에서 내가 살고 있는 시골로 오셨다.

변(辯)은 할배, 할매께 손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여 드린다고 하셨지만 실상은 밑이 훤히 보이는 쌀통을 본 생모가 한꺼번에 입 서넛을 들어낼 요량으로 생부와 두 동생들을 시댁으로 보낸 것이었다.


재수 좋은 어느 해는 누나 둘까지 데리고 오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게는 2+2의 보너스였다.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이내 멋있는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생부와 피부가 뽀얀 대도시 아이 두 동생들을 기다란 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생들이 오면 보여주려 메뚜기와 매미, 잠자리들을 미리 잡아 집 안 구석진 곳에 몰래 숨겨두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멱을 감고 놀았던 큰 강(우리는 그곳을 '배로'라 하였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도(車道)가 있었다.

창자처럼 구불거리고 포장이 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못생긴 도로였다.


어린 나는 친구들과 그 강에서 멱은 감고 있었지만 눈은 늘 차도에 두었다.

차도 먼 곳에서 먼지만 나도 내 시선은 먼지 쪽으로 향했고 그 먼지를 일으키는 자동차가 버스이면 내 심장은 쿵쾅거렸다.


멀리서 보이던 버스는 이내 내가 멱을 감고 있는 곳 앞을 달렸고 내 눈은 버스 안을 스캔하였다.

어떤 날의 버스는 승객들로 가득하였지만 어떤 날의  버스는 타고 있는 승객이 거의 없어 안이 훤이 보일 때도 있었다.

그 몇 안 되는 승객들 중에 아버지와 동생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내 심정은 열심히 준비한 시험 결과를 가슴 조이며 보았는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는 심정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왠지 기분이 좋았다.

산속에서 울어대는 새소리가 내가 좋아하는 가수 노랫소리로 들리고 벼가 익어가는 논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는 참제비들이 춤추는 무용수로 보였다.


햇볕은 이내 불볕으로 변해 이글거리고 나는 또래들과 또 '배로'로 향했다.

친구들은 멱을 감으러 그곳에 갔고 나는 읍내에서 들어오는 버스를 기다리려 갔다.

버스가 오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내 눈은 읍내 쪽 산모퉁이에 고정되었고 심장은 작게 콩닥거렸다.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라는 한자를 처음 배웠을 때 어렸을 적 '배로'의 그때가 저절로 생각났다.


드디어~

읍내 쪽 먼 산 언저리에 먼지가 일었다.

나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친구들이 멱을 감고 있는 강에서 나와 차도 쪽 얕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기다림을 진작에 알아차린 친구 광순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말했다.

"저 뻐스에 느그 아부지하고 니 동생이 타고 올끼다.

쪼매 있다가 같이 보자."


멀리서 작은 점으로 보였던 버스가 어느새 버스로 보이더니 이내 내가 있는 차도로 지나갔다.

나와 광순의 동공이 두배로 커지고 그 동공은 이내 버스 안으로 들어가서 승객들을 훑었다.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은 생부와 옆자리에 앉은 두 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광순이 동시에 보았다.

"종열이 니도 봤제?

옷 입고 빨리 가봐라."

광순이 씩 웃었다.


입을 옷이래야 다 떨어진 긴바지를 가위로 잘라 만든 반바지와 낡고 해진 러닝 한 벌, 발이 크면 따라 커지고 지독히도 닳지 않는 타이어표 깜둥 고무신이 전부라 금방 입고 신을 수 있었다.


뛰었다.

그동안 수 십, 수 백번을 오갔던 길인데도 오늘따라 그리도 멀게 느껴졌다.

내 다리는 계속 허공으로 헛발질하고 내가 뛰어서 간만큼 마을은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허위허위 뛰어서 도착한 마을에 이미 버스는 없었고 버스가 일으킨 먼지도 없었다.

버스가 떠난 지 꽤나 되었나 보다.


차도 앞에서 가게를 하고 있는 동진이 엄마가 땀이 범벅으로 뛰어 온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종열아~

방금 대구에서 느그 아부지하고 느그 동생들이 왔데이

니 퍼뜩 가봐라"


좋은 소식은 미리 알고 있는 일인데도 다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입을 귀에 걸고 작은 집(나는 그때 나의 생조부님이 살고 계시는 집을 작은 집이라 불렀다)으로 뛰어가는 내 뒤에서 동진이 엄마가 말씀하셨다.

"하이고

저 쪼맨한기 그래도 지 핏줄은 땡기는 갑데이

저래 좋아하는 거 보이끼네."


한 걸음에 도착한 작은 집 마당에 생부와 동생들이 조금 전 내가 버스 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 얼싸안고 반겨야 했지만 이미 시골아이가 다 되어 버린 그때의 나는 부끄러워 대문 옆에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봐야만 했다.

입에 손가락을 넣고 그들중 누군가가 나를 보고 들어오라고 해주기만 기다렸다.


"열이 니 와 거기서가(거기에 서서)그카고 있노?

느그 아부지 오셨는데........

파뜩 인사해라"


생조모가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하셨다.


"오셨능교?"
지금껏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었던 내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오야(오냐)

니 공부 잘하고 있제?"


긴 시간 동안 헤어져 있던 나와 생부의 서로에 대한 인사는 참으로 짧았다.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졌다.

어쩌면 천륜(天倫)도 희미하였다.


어차피 나는 생부와의 조우보다 두 동생들과의 만남이 목적이었고 기다림이었으니까 생부와의 짧은 어색함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생들은 이내 나를 보고 반겼고 나는 동생들을 더 반겼다.


대구에서 자동차들만 보며 지냈던 동생들은 눈앞에 보이는 시골 풍경이 신기하였는지 내 손을 잡고 들에 가보자, 산에 가보자 하며 그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나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다.

내가 일 년 내내 부러워했던 형제 둘을 한꺼번에 얻었고 그들이 신기해하는 시골의 구석구석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는 나 자신이 기특하고 뿌듯하였다.


다음날

나와 동생들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에 일어나 시골의 아침을 구경하였다.


마구간에 엎드려 긴 숨을 내쉬며 되새김질하는 황소와

토담 위에는 잠자리가 날개를 내리고 나와 동생들이 다가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었고, 그 토담 아래에 피어있는 노란색 호박꽃 안에서 열심히 꿀을 찾고 있는 꿀벌의 몸도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로 메뚜기 한 마리가 바쁘게 뛰어가고 그 옆으로 기어가는 두꺼비는 한걸음 옮기고 한참을 쉬고 한걸음을 옮기도 또 한참을 쉬었다.

세상 바쁠 것이 없었다.


동생들은 모든 것을 신기해하였고 그 신기함을 하나라도 더 보여 주고 싶은 나는 어깨가 우쭐거렸다.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먹은 나와 동생들은 냇가로 달려가서 물고기를 잡고 고디(다슬기)를 잡고 강가에서 모래성을 쌓았다.

냇가에서 해가 질 무렵까지 그렇게 놀았다.


해가 지고 마을전체가 어두워지면 집 앞마당에 어지러울 만큼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쫒다 들어와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할매가 구워 놓으신 감자를 먹었다.

멍석 옆에서 찌깻불(모기 퇴치 불)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다.


두 동생들은 접해보지 못하였던 시골의 풍경에 행복해하였고 나는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하였던 형제애에 행복하였다.


늘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있을 것만 같아 무서웠던 화장실을 갈 때도 방에 생부와 동생들의 있다는 생각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동생들이 오고 난 나의 하루는 삼추(三秋)가 일각(一刻)이었다.


이제는 대구로 간다고 하였다.

내년 여름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오늘 하루는 비가 많이 내려 버스가 우리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였으면 바랬지만 하늘은 맑았고 버스는 기어이 들어와 생부와 두 동생들을 싣고 떠나 버렸다.

그날도 동생들이 왔을 때처럼 버스가 떠난 뒤에 먼지가 일었다.


55년 전의 추억이다.


그때 나는 매년 여름을 간절히도 기다렸다.

여름이 되어야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동생들을 간절히도 기다렸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기다릴까?

거울을 볼 때마다 늘어나는 주름과 흰머리가 이제 당신이 떠나야 할 때가 시나브로 다가오니 슬슬 준비를 하라며 재촉을 하니 떠날 날을 기다려야 할까?


내일 당장 떠날지라도 이렇게 살다 떠나자.

몸 아프다, 마음 아프다 징징대지 말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누구를 가르치려 들지 말고

나를 서운하게 했다고 삐지지 말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지 말고.............


55년 전의 기다림은 간절하였지만 지금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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