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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Aug 06. 2024

1등을 하는 새로운 방법

나만 나갈 수 있는 대회라면...

2024년 8월 파리 올림픽이 열렸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성적을 내며 많은 국민을 기쁘게 했다. 양궁 선수들은 전 종목 금메달을 싹쓸이했다. 아내는 이러다가 올림픽에서 양궁을 없애는 것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펜싱, 사격, 유도, 배드민턴, 탁구, 수영 등 다른 종목 선수들도 많은 메달을 땄다. 선수들이 4년 동안 흘린 땀을 보상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난 메달을 딴 선수들이 시상대에 오르며 짓는 표정을 보는 게 좋다. 환희에 찬 밝은 웃음을 짓는 선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선수, 센스있는 포즈를 취하는 선수.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뻐하는 그들을 보면 나도 함께 기분이 좋아진다. 동시에 나는 그들이 부럽다. 세계 1등을 하면 무슨 느낌일까? 시상대 꼭대기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기분은 어떨까? 특히 나보다 어린 금메달리스트를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저 나이에 도대체 뭘 했나….’     



나도 금메달 한 번 목에 걸어볼 방법 없을까? 아니면 국가대표라도 한 번 되어봤으면 좋겠는데. 국가대표가 되려면 무엇인가를 잘해야 한다. 그것도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정도로 잘해야 한다. 어렸을 때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 라이어’라는 책이었다.      


성취 공식은 ‘재능 더하기 연습’이다. 문제는 심리학자들이 재능있는 이들의 경력을 관찰할수록 타고난 재능의 역할은 줄어들고 연습이 하는 역할이 커진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스무 살이 되면 엘리트 학생은 모두 1만 시간을 연습하게 된다. 반면 그냥 잘하는 학생은 모두 8,000시간, 미래의 음악 교사는 4,000시간을 연습한다.
<말콤 글래드웰 / 아웃라이어>     



교사로서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미래의 국가대표가 되어 대한민국 교사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알리리라. 그래. 1만 시간이면 나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 그럼 1만 시간이 어느 정도지?    


 

1만 시간은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말콤 글래드웰 / 아웃라이어>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을 시작했다. 어떤 종목을 해야 할까? 우선 10년 후의 나이를 생각하면, 격한 운동은 힘들어 보인다.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40대에 금메달리스트가 있는 종목을 찾아야 한다. 인터넷에 ‘40대 금메달리스트’라고 검색해보았다. 찾았다! 내 롤모델! 기사 제목을 소개한다.      



오락실 다니던 아이 40대에 금메달리스트. 김관우 “하면 된다.”     

스트리트 파이터 초대 챔피언 김관우. e스포츠 사상 한국의 첫 금메달리스트 



방법도, 종목도 정해졌다. 하루에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스트리트 파이터'를 연습하겠다. 이제 남은 것은 아내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주말에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국가대표가 될 로드맵을 소개하려 했다.

“이제 스트리트 파이터 국가대표를 준비해볼까 해. 1만 시간의 법칙 알지? 하루 세 시간씩 10년을 하면 된대. 나를 위해, 우리나라를 위해 30대를 바쳐보려고…. 내가 꼭 국가대표 아내로 만들어줄게.”

이 말을 듣고 허락을 안 해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하필 그 주에 내 희망을 꺾는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1만 시간의 법칙’을 주제로 한 ‘슈카월드’ 채널의 영상이었다. '슈카'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게임을 1만 시간 넘게 한다고 임요환이 안 돼요. 이 이론이 어느샌가 쏙 들어가요. 수많은 실증 사례들이 나왔거든. 연습은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지만, 그게 다른 사람보다 낫게 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난 그의 말에 100% 수긍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꽤 많은 시간을 해 온 내 스타크래프트 실력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그의 말은 옳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슈카’님은 내 희망을 꺾은 악인이 아니라 내 시간 낭비를 막아준 귀인이었다.


           

그렇게 국가대표의 꿈은 물 건너갔다. 1등 한 번 해보겠다는 꿈은 잊고 살았다. 그런데 달리기를 하면서 1등을 하는 새로운 방법을 깨달았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1등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삼일절에 열리는 마라톤을 신청할 때였다. 모든 대회가 그렇듯이 이름, 나이, 출전 거리 등을 쓰는 칸이 있었다. 그런데 키, 몸무게를 적는 칸을 지나 발 사이즈를 적는 칸도 나왔다. ‘뭐 이런 것까지 물어보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뭐 대단한 개인 정보도 아니었기에, 하나하나 정직하게 채워 넣었다. 심지어 마지막엔 MBTI를 적는 칸도 있었다.     



3월 1일.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날. 인천 송도에서 10km 마라톤을 참가했다. 내 목표는 45분 이내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송도의 매서운 바닷바람에 맞서 최선을 다해 달렸다. 기록은 44분 14초. 목표를 달성했다. 나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기록이기에 몇 등쯤 했을지 궁금했다. 다음 날 성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1,724명 중 70등을 했다. 내가 그 많던 사람 중에 70등이라니!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기록증에는 전체 성적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의심하며 적었던 키, 몸무게, 발 사이즈 등의 항목별 성적이 모두 나왔다.      



나는 남자 1,180명 중 57등을 했다. 나보다 잘하는 여자 러너들을 제외하자 13등이 올랐다. 나는 키 183cm 중에서는 무려 2등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후로 처음 해본 달리기 2등이었다. 키 183cm가 총 몇 명이었냐고? 그걸 굳이 알아야겠는가? 총 17명이다. 어쨌든 2등이지 않은가. 내가 2등을 한 부분은 더 있다. MBTI가 INTP인 사람 중에서 2등. 몸무게가 76kg인 사람 중에서 2등. 이 정도면 이제 내 실력을 믿겠는가? 아 몇 명 중에서 2등이냐고? 그걸 알아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MBTI가 INTP인 사람은 총 37명, 몸무게가 76kg인 사람은 총 22명이었다. 경쟁자가 너무 적다고? 어쨌든 2등이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1등도 했다. 아까처럼 이삼십 명 중에 1등이 아니다. 무려 74명 중에 1등이다. 나는 동갑 중에 1등이었다. 이름 모를 친구들아! 덕분에 내가 달리기 1등도 해본다.      



이렇게 1등을 하는 새로운 방법을 깨달았다. 새로운 조건을 계속 넣어보는 것이다. 내가 마라톤 1등을 할 수 있는 날은 평생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대회’, ‘동갑’이라는 조건을 추가하니 1등이 되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가지 분야에서 1등을 하는 건 엄청난 재능을 가지지 않는 이상 어렵다. 하지만 여러 능력을 조금씩 길러나가며 조합 하다 보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시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것은 평생을 노력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너무 많다. 내가 마라톤 1등을 하는 것도 이번 생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두 가지를 합쳐서 ‘가장 잘 가르치는 마라토너 대결’ 또는 ‘선생님 마라톤 대회’라는 종목을 만든다면, 내 순위가 많이 올라갈 것이다. 여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것을 다 때려 넣는다면 내가 최고인 나만의 종목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드럼을 칠 줄 알고, 한자 2급 자격증이 있고, 초등 정교사 자격증이 있고, 격투기 아마추어 대회 참가 경험이 있는 사람만 참여할 수 있는 마라톤 대회’라면 1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안 된다면 까짓것 1년 동안 영어 공부해서 ‘영어로 의사소통 가능한 사람’이라는 조건도 넣지 뭐. 그래도 1등을 못 한다면 ‘키 180cm 이상만 참여 가능’이라는 구차한 조건까지 넣는다면 되지 않을까?     

1등 한 번 하려고 그렇게까지 하는 게 의미가 있냐고?

그럼 당연히 있지. 

내가 대한민국 최고가 되는데, 기분이 좋잖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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