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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Aug 08. 2024

갓생과 소확행

이젠 '갓확행'시대다

TV 광고에서 “오늘부터 갓생 산다!”라는 문장을 들었다. 처음 보는 낯선 단어에 궁금증이 생겼다. 갓생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모르는 단어는 앞뒤 문맥으로 추론하는 것이 지성인의 기본자세지. 광고 속 인물이 열심히 하루를 보내는 걸 보면 나쁜 뜻은 아니겠군. 갓은 김삿갓의 갓은 아닐 것이고, GOD일 확률이 90% 정도 되겠군. 역시나 그럼 좋은 뜻이겠군. 신의 삶일까? 음. 모르겠다. 그냥 좋은 거로 생각하자.    


  

그렇게 넘어갔지만, '갓생'이란 단어는 계속 내 눈에 띄었다. SNS 글에서, 유튜브 영상에서, 심지어 책 제목에도 등장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에 이 정도로 많이 쓰는 단어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보다는 훨씬 요즘 말을 잘 아는 아내에게 물어봤다.      


"갓생이 뭐야?"

"요즘 갓생 산다고 많이 하잖아."

"그래서 갓생이 무슨 뜻이야?"

"열심히 사는 거를 요즘 갓생 산다고 해!"

그렇구나. 그래도 절반은 맞았다. 좋은 뜻이니까.      


갓생은 'God'와 '인생'을 합친 신조어라고 한다. 사전에 없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실천 가능한 범위에서 열심히 살자'라는 의미인 것 같다. 어려운 목표보다는 소소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나가며 생산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반영한 단어이다.      




언젠가부터 여름이 말도 안 되게 더워졌다. ‘여름이니까 덥지’라는 말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살인적인 날씨다. 이런 여름에 달리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호흡이 평소보다 훨씬 가빠지고, 의식이 흐릿해진다. 일사병이나 열사병에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러너들은 여름에도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양보다 부지런해지길 선택한다. 태양이 눈을 뜨기 전 새벽에 나와서 달리거나, 태양이 완전히 잠에 빠져든 한밤중에 달린다. 더운 날씨는 그들에게 더 이상 핑계가 되지 않는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달리기로 결심했다. 새벽 6시에 알람을 맞추고 잠이 들었다. 처음엔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끄고 계속 잠을 잤다. 그래도 알람을 계속 맞춰두니 일주일에 1번쯤은 일어나서 달리게 되었고, 그 숫자도 계속 늘어갔다. 지금은 특별히 피곤한 날이 아니면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러너들 뿐만이 아니다. 이른 아침 공원을 달리며 축구장, 야구장, 풋살장, 테니스장, 농구장을 지난다. 어느 하나 비어있는 곳이 없다. 이른 아침부터 공놀이를 위해 부지런히 모인 사람들. 아무리 내가 일찍 나와도 이미 그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벽을 달리면서 느꼈다. 우리나라엔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그들에겐 굳이 '갓생'이라는 단어가 필요한가 의문이 든다. 그냥 '인생'이라는 단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인간이야말로 진정으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 동기가 추천하는 책이라며 빌려주었다. 책 제목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였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던 동기였기에 믿고 읽기는 했지만, 큰 감명은 받지 못했다. 책을 다 읽고 돌려주자, 동기가 물었다.

"책 어땠어?"

"음, 뭐 좋았어."

"겨우 그 정도야? 이 책이 요즘 베스트셀러 1위라고. 나도 이 책의 작가처럼 소확행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겠어."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소확행? 그게 뭐야?"

"소확행을 모른단 말이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이잖아. 올해 출판사에서 꼽은 키워드 1위라고."

그가 답답하다는 듯 길게 설명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하루키의 에세이집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떠올랐다. 이 책은 국내에 1999년에 출간되었으니, 거의 20년 전에 하루키는 우리나라 출판계의 핵심 키워드를 예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말은 소확행이 유행하면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하루키의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키의 소확행과 떡볶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소확행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인다. 하루키가 소확행을 얻는 과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확행은 그냥 소확행이 아니다. ‘갓생’을 살며 느끼는 ‘소확행’이다. 하루키는 말한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하루키는 음악을 좋아한다. 그의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루는 그가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오리지널 레코드판을 발견했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충분히 살 수 있었다. 하루키는 그 레코드판을 사려고 가게에 들어가다가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는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절제 없이 사도 되는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결국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다. 하루키는 여행 도중 중고 레코드 가게에 들렀다. 그곳에서 그는 예전에 자신이 절제하며 사지 않았던 레코드판을 발견했다. 전에 사려고 했던 가격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저렴했다. 이렇게 싼 가격에 다시는 이 레코드판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 확실하며 하루키는 그 레코드판을 샀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무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많은 사람이 하루키의 이런 면을 보지 못하고, ‘작지만 소소한 행복’에만 집중한 것 같다. 떡볶이를 먹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지만, 잠시 후면 배불러질 것이고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하루키의 ‘랑겔한스섬의 오후’라는 글에서는 요즘에 사람들이 말하는 소확행과 비슷한 대목도 나온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하지만 하루키는 하루도 빼지 않고 5km에서 10km를 달린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쓰이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러너’라고 부른다. 매일 10km를 뛰고 나서 샤워를 하기 전 반듯하게 접힌 속옷을 보며 행복해하고, 샤워를 마친 뒤 셔츠를 입으며 정갈한 면 냄새에 행복해한다. 그 후에 거실로 나와,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먹으며 다시 한번 행복을 느낀다. 10km를 뛰고 와서 먹는 빵과 방 안에서 누워있다가 먹는 빵은 다를 것이다. 꼭 노력이 있어야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니겠지만, 노력한 후에 만나는 행복은 분명 공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한 번 따라 해보았다. 주말 아침에 일어나 동네 공원을 10km를 달렸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빵집에 들른다. 내가 좋아하는 앙버터 빵과 아내가 좋아하는 명란 바게트를 골라 담는다. 계산하러 가는 길에 방금 나온 소시지 빵이 보여 그것도 하나 담는다. 계산하며 아내에게 카톡을 보낸다. ‘빵 사서 갈게!’. 그리고 집까지 남은 약 3km의 거리를 빵 봉투를 꽉 쥔 채 달린다. 집에 도착해서 골라 온 빵을 아내에게 자랑한다. 샤워를 하기 전 완전히 젖은 티셔츠의 땀 냄새에 행복해하고(이거 맞나?), 샤워를 마친 후 정갈한 속옷 냄새에 행복해한다(이것도 이상한데?). 그 후에 거실로 나와 방금 사 온 빵을 먹으며 행복을 느낀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행복을 누리는 것은 서로 대척점에 있지 않다. ‘갓생’과 ‘소확행’을 모두 이룰 수 있다. 이름하여 ‘갓확행’. 누구나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금요일 저녁 10km를 달리고 마시는 맥주. 따스한 봄날 여의도를 달리며 보는 벚꽃. 더운 여름 해변을 달리다가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 때 느끼는 시원함. 꼭 달리기가 아니어도 좋다. 모두가 자기만의 ‘갓확행’을 만들며 행복과 보람을 느끼면 좋겠다. 이젠 '갓확행' 시대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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