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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Aug 20. 2024

의미 있는 고통이라면

시시포스를 생각하며

그리스 신화에 시시포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시시포스는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 헬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코린토스라는 나라를 세웠다. 시시포스는 백성을 위하는 좋은 군주였지만 그리스의 신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시포스가 신들의 말을 엿듣기 좋아했고, 신을 자주 기만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를 고자질하기도 했으며, 하데스를 속이기도 했다. 결국 하데스는 시시포스에게 저승에서 산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을 내린다.     



시시포스는 있는 힘을 다해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고 갔다. 꼭대기에 도착하자마자 바위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는 다시 내려가 그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린다. 바위는 또다시 제자리로 내려온다. 시시포스는 이를 계속 반복해야 했다. 절대로 바위를 언덕 정상 위로 올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바위를 굴려야 한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의 마음은 어떨까?     


달리기는 다양한 훈련이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싫어하는 훈련은 업힐 훈련이다. 업힐 훈련은 마라톤 대회에서 피할 수 없는 언덕길을 대비하는 훈련이다. 출발선에서 200m 정도의 오르막길을 빠르게 달려서 올라간 뒤, 천천히 다시 내려온다. 출발선에 도착하면 다시 오르막길을 달리고, 도착하면 또다시 내려온다. 이를 10~12회 정도 반복한다. 200m는 그리 긴 거리가 아니다. 누구나 달릴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오르막길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완만한 평지를 뛸 때보다 훨씬 더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간다. 심박수도 금방 높아진다. No pain, No gain이라지만, 가느다란 두 다리를 가진 나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두 번째로 내가 싫어하는 훈련은 트랙 장거리 훈련이다. 장거리를 달릴 땐 보통 넓은 공원에서 달린다.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면 보통 3km에서 5km 정도가 된다. 20km를 달린다고 하면 4바퀴에서 7바퀴 정도를 돌면 된다. 하지만 트랙은 한 바퀴가 400m밖에 되지 않는다. 5바퀴를 돌아도 2km밖에 되지 않는다. 20km를 달리려면 50바퀴를 달려야 한다. 25바퀴를 돌아도 25바퀴를 더 달려야 한다. 이건 과연 훈련인가 얼차려인가?     


트랙 훈련의 장점도 있다. 우선 길이 매우 평평하다. 언덕이 전혀 없고, 달리기 매우 좋은 환경이다. 또 다른 장점은 기록을 측정하기 좋다. 요즘은 GPS 시계가 성능이 아주 좋다. 어디에서나 속도와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그래도 트랙에서 달리는 것보다 정확하진 않다. 대부분 트랙이 1레인에서 달리면 400m이다. 거리도, 속도도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는지 확인할 때는 트랙에서 달려보는 게 가장 좋다.     



업힐 훈련과 트랙 훈련의 공통점이 있다. 엄청나게 지겹다. 완전 지겨워 죽겠다. 마치 내가 시시포스의 형벌을 받는 기분이 든다. 달릴 때마다 생각한다. ‘이거 왜 이렇게 안 끝나나.’, ‘내가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 숨이 차고, 다리가 조금씩 굳어가는 육체적 고통보다 지겨움이 주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훨씬 더 괴롭다. 정상에서 다시 땅으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시시포스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나처럼 일그러진 표정이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의 마지막엔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내가 도대체 지금 이걸 왜 하고 있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를 부조리의 영웅이라고 한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끝나지 않는 영겁의 고통. 시시포스는 그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시시포스는 그저 성실하게 돌을 밀어 올리고 굴러떨어지는 돌과 함께 다시 내려온다. 끝이 없는 이 싸움을 반복한다. 카뮈는 시시포스의 이런 성실과 노력을 부조리에 대한 저항으로 본다. 카뮈는 말한다.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성실과 노력을 '구속'이 아니라 '자유'로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은 순수해진다.’     



행복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행복은 영원한 쾌락의 상태도 아니다. 아무런 고통도 없는 세상, 모두가 온종일 기쁨이 넘치는 천국 같은 세상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삶은 고통과 쾌락이 칵테일처럼 섞여 있다. 우리는 고통 없이 쾌락만 가득한 유토피아를 찾기 위해 방황해선 안 된다.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행복을 찾아야 한다.


      

니체는 말했다. 인간이 견디지 못하는 고통은 바로 ‘무의미한 고통’이라고. 반대로 ‘의미 있는 고통’이라면 인간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니체의 말을 듣고 내가 그토록 힘들게 달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만큼 달리기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또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나서 느끼게 되는 한 단계 성장한 내 모습은 엄청난 희열을 준다.


      

수험 시절에 봤던 한 영상이 떠올랐다. 인터넷 강의 회사 ‘메가스터디’의 손주은 회장이 강사 시절 수험생들에게 쓴소리하는 영상이다. 손주은 회장도 고통의 의미에 대해 역설했다.      


“내가 분명히 한마디 하겠는데, 인생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나쁜 일이야. 밤새 오락하고 나오면 환희가 밀려오나? 밤새 만화책 보고 나면 세계를 얻은 것 같더나? 아니잖아! 쉽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나쁜 거야. 정말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 정말 너무나 힘들 것 같은 일. 그런 일을 하고 나면 정말 의미를 얻고, 환희를 느낄 수 있어. 인생에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해.”      



나는 손주은 회장과 생각이 다르다. 삶의 고통을 긍정하며 즐길 수 있는 존재는 되지 못한다. 고통은 최대한 피하고 싶고, 아픈 건 딱 질색이다. 고통스러운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면 난 당연히 고통스럽지 않은 일을 선택을 할 것이다. 아무래도 회장님은 못 될 팔자다. 그래도 달리기를 하며 그의 말이 조금씩 마음에 와닿는다. 가끔은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일부러 더 고통스럽게 달려보려고 한다. 삶의 작은 형벌을 기꺼이 웃으며 받아들이려 한다. 달리기는 그만큼 의미있는 일이니까. 의미만 있다면 우린 고통 속에서도 얼마든지 춤을 출 수 있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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