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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Aug 24. 2024

하루를 기억하는 특별한 방법

러너들의 기억법

1936년 8월 9일. 우리나라의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날이다. 그날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는 애국가가 아닌 일본 국가가 울려 퍼졌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다. 손기정 선수는 금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오직 금메달리스트에게만 주어지는 월계수 화분을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리는 데 사용했다. 치욕과 절망을 느낀 손기정 선수는 이날 이후 다짐했다.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      



그날 시상대에 함께한 우리나라 선수가 있다.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이다. 남승룡 선수는 손기정 선수의 선배이자 라이벌이다. 시상대에 선 남승룡 선수는 손기정 선수가 너무나 부러웠다고 한다. 그가 부러웠던 건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이 아니었다.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월계수 화분이었다. 가슴 그려진 일장기를 가리지 못한 그는 세계 3위를 하고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56년 뒤 같은 날.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그때 황영조 선수는 당당히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시상대에 올랐다. 바르셀로나 경기장에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황영조 선수는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의 치욕을 씻어냈다. 이후 8월 9일은 우리나라 마라톤 역사를 상징하는 날이 되었다. 지금도 8월 9일이 되면 많은 러닝크루에서 8.9km를 달린다. 가슴 아픈 역사의 날이자 영광의 날을 되새기는 러너들만의 방식이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에 빛이 돌아온 날. 광복절. 수많은 러너는 8.15km를 달리며 그날을 기념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신 수많은 분들께 감사의 표시를 건넨다. 달리는 가수 ‘션’씨는 이 마음을 모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는 광복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마라톤 대회를 열기로 한다. 바로 815런. 그는 직접 81.5km를 달렸다. 새벽 5시부터 시작한 이 도전은 9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풀코스 42.195km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거리, 한여름의 뜨거운 날씨를 모두 이겨내며 그는 완주에 성공했다. 완주 후에 그는 말했다. 

“감히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독립투사 분들에게 우리가 빚진 게 너무 많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나의 최선의 것을 드린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했습니다.” 


‘815런’으로 모인 후원금 전액은 독립 유공자 후손 분들 집을 짓는 데 쓰인다. 현재 16채를 지어드렸고, 지금도 계속 집을 짓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달리기가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     




좀 더 가벼운 달리기도 있다. 내 생일을 스스로 자축하는 생일런. 4월이 생일인 나는 4km만 달리면 된다. 이럴 땐 12월이 생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12.25km를 달릴 땐 예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예수님, 몇 달만 좀 더 일찍 태어나시지….”

봄의 크리스마스, 여름의 크리스마스, 가을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려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크리스마스는 겨울이어야 제맛인 것 같다. 생각을 고쳐먹고 바로 회개한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인 게 좋겠네요. 차라리 제가 좀 더 달리겠습니다.”



2024년 1월 1일.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새해를 맞이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러닝크루 단톡방에서 한 메시지를 보았다. 

“혹시 내일 20.24km 함께 달리실 분 없나요?”

당시 나에게는 조금 긴 거리였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답장을 보냈다. 

“저도 달리겠습니다!”          

다음 날 송도의 센트럴 파크에서 20.24km를 달렸다. 힘들었지만, 함께라서 달릴 수 있었다. 20km를 지나고선, 20.24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스마트 워치에 눈을 고정한 채 달렸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아주 신중하게 달렸다. 마지막 20.23km에선 거의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잠시 후 스마트 워치에 20.24라는 글씨가 뜨자 잽싸게 발을 멈췄다. 아주 의미있는 새해였다. 뒤를 돌아보니 한 분께서 매우 아쉬운 표정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아이고!! 20.25km 돼버렸네요!”

다른 분께서 센스있는 답변을 해주셨다. 

“내년엔 안 뛰셔도 되겠네요”     




우리의 하루하루는 그저 흘러간다. 하루를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는 방법은 기록뿐이다. 의미 있는 날을 기록하기 위해 우린 일기를 쓰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영상을 찍기도 한다. 수많은 기록의 방법에 달리기 하나를 추가해봐도 좋을 것 같다. 직접 내 두 발로 기록하는 하루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본 사업 아이템을 소개한다.

바로 ‘대신 달려주는 남자’     


‘기념일 대신 달려드립니다!

꼭 기념하고 싶은 날이 있나요?

나에게 의미 있는 소중한 하루가 있나요?

생일, 결혼 기념일, 가족 행사, 회사 창립일 등.

제가 대신 달려드립니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모두 가능합니다!

대신 달려주는 남자.

지금 바로 신청하세요!’     


가격은?

돈 받긴 좀 애매한 서비스지요?

뭐. 까짓것. 무료로 해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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