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의 어머니

by 오흥주

우리 동네는 지금도 "가장 덥다, 가장 춥다!"라고 이야기가 나오는 그런 지역이다. 더울 때는 너무 덥고 추울 때는 가장 추운 그런 동네다. 우리 동네는 아주 자그마한 면단위 소재지였고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지금은 골프장과 스키장이 생겼지만 그때는 군부대가 많아서 담배소비가 많았는데 우리 집은 담배와 지금으로 이해하면 편의점에 파는 모든 잡화와 막걸리를 되로 해서 테이크아웃도 했고 가게에서 양미리와 김치를 내줘 마시고 갈 수도 있었다. 양조장에서 배달하는 차가 와서 가게 안의 항아리에 막걸리를 주유소 주유기처럼 커다란 독에 채우기도 하고 우리가 자전거에 한말짜리 플라스틱 통을 가져가 막걸리를 받아와 항아리에 넣어서 그 술 항아리에 나무로 된 1되짜리 되로 아마 지금 1리터짜리 나무 되로 1되~2되를 주전자에 넣어줘 판매를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막걸리 유통업과 담배, 일반 잡화를 취급했다. 먹을 것들 과자, 음료, 식표품등 슈퍼마켓이라고 하여간 모든 것을 취급했다.

우리 동네엔 작은 제재소가 있었고 거기에서 나무를 켜서 인근지역 가구소와 땔감과 톱밥을 팔아서 제재소를 운영했고 그 제재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근무를 했기에 그리고 큰 통나무를 옮겨서 큰 톱으로 나무를 이동하다 보니 근처에 많은 분들이 이 제재소를 생업으로 하시는 분이 많았다. 아마도 40~50여분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모든 생활과 가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우리 집은 2남 4녀의 대가족이었고 각자 방과 후 어머니의 그 많은 일들을 나눠서 분담을 했다. 그 제재소에 지금으로 말하면 함바집 용도였고 오후 4시에는 참으로 라면과 국수를 제재소로 배달했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뒷모습이 너무 선하고 위태위태해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너무 존경하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은 항상 단호하셨고 주무실 때 흐느껴우시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교 축구운동선수 출신이어서 맬 축구를 하고 오후 4시에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했다. 어머니는 근처 제재소에 국수와 라면을 섞은 국수라면을 배달하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 어머니는 고무신에 커다란 김이 오르는 큰 다라에 국수를 이고 근처 제재소에 참으로 국수를 100m 정도를 배달을 하고 계셨다. 리어카로 국수를 운반하시는 것을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라 배달을 싫어하셨고 직접 국수를 배달하는 것은 어머니가 전담하셨다. 어머니 몸보다 커 보이는 국수다라를 머리에 이고 가셨고, 가실 때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니 항상 어머니가 위혐해 보였고 어머니의 겨울철에는 그 큰 국수다라를 메고 가시는 것 보고 어머니 뒤에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가곤 했다. 어머니는 위험하다 보니 한 마디도 없이 입을 다문 모습이 너무 결연해 보였다. 겨울철 어머니의 걸어가시는 걸음걸이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흡사 목욕탕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집은 면단위에서 유일하게 다이얼 돌리는 전화기를 가지고 있었다. 동네에 걸려오는 전화기는 아참 전화기 시스템부터 이야기하면 전화를 수화를 담당하는 중간에 연결해 주는 여직원이 있었는데 그분에게 몇 번이라고 전화를 하면 전화가 연결되는 방식인 것이다. 교환을 통해서 연결하는 방식으로"서울 몇 번 바꿔주세요! 잠 깐 만이요!" 이런 방식이었는데 참으로 인간적인 전화였다. 전화가 유일하다 보니 겨울에 급한일로 대개는 초상이 났다는 아니면 병원에 급히 입원한다는 이야기를 동네에 우리 집으로 전화가 오는 방식이었다. 전화로 우리 집으로 오면 "순자 누나네 이모가 병원에서 급하게 전화 왔는데, 전화 바꿔 달라고 하네! " 어머니가 이러시면 그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날 집을 나와 양말도 안 신은 채로 옷을 입고 1KM 정도를 가서 "순자누나! 누나네 이모가 전화받으라는데요!" 그러면 그 겨울에 순자누나랑 다리를 건너 우리 집으로 돌아와 그 누나는 우리 집 안방에서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가 전화가 오면 교환이 서울에서 누가 전화 통화를 원한다고 하면 기다렸다가 그 전화를 순자 누나가 통화를 한다. 아마도 전화를 하면 거는 사람이 요금을 내는 방식이라, 대개는 기다리다가 전화를 받는다. 어떤 때는 급하다고 전화를 할 요량으로 전화비를 주겠다고 하면 어머니는 "괜찮아요! 시급을 다투는 일인데 하면서 부담을 주시지 않으신다. 요금은 해외통화처럼 전화를 거는 사람 받는 사람이 둘 다 전화비를 내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 이렇게 말하시고는 전화를 쓰게 하셨다. 심지어 우리 집의 아들 딸들이 겨울저녁에도 이러한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의 이런 선행을 하늘님은 알랑가?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배포가 대단하셨다. 그 없는 살림에도 필요하다 싶을 때는 동네일에 쾌척을 하셨다. 장사가 잘돼던 터라 어머니는 동네 어르신네들 집으로 들여서 막걸리 한잔에 노가리 안주를 내놓기도 하셨고 이북사람들 가진 억척스러움과 배포를 함께 지니고 계셨다. 참으로 내가 어머니에게 받고 싶은 많은 것 중 하나인데 잘 못 받은 것 같다. 우리 어머니는 이북 황해도 출신이었는데 우리 어머니의 배포는 실로 대단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 집에는 흑백 TV가 있었는데 우리 동네에 면장네와 두 집이 TV가 있었다. 우리 집 tv는 큰 누나가 동네에 근무하는 대위 아저씨랑 결혼하였는데 그 매형이 서울서 사다준 빨간색 금성 tv였던 것이다. 썩 크지도 않았는데 그 TV는 동네 자랑이었던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아마도 토요명화, 전설의 고향 2가지 콘텐츠의 인기는 어마어마했었는데 토요명화를 할 때는 시간이 저녁 늦게 하던 터라 지금 생각해 보면 저녁 9:30분이었던 것 같았는데 어머니가 너무 피곤하게 주무셔서 어머니 코 고는 소리에 TV 소리를 줄이는 데 까지 줄이고 조용해 보곤 했는데 토요일 "석양의 무법자" 하여간 어머니 깨실까 봐 어머니 눈치 보면서 보곤 했던 기억과 저녁시간에 하던 '전투'라는 전쟁 드라마 이런 영화들은 진짜 TV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중에 백미는 전설의 고향 '구미호'는였는데 방송시간이 저녁 8시 정도 됐던 것 같다. 아마도 초저녁 조금은 이른 시간에 하다 보니 여름에 납량특집으로 했었는데 가마니를 깔아놓고 그 가마니에서 동네 어르신네들이 여름에 부채를 부치면서 '전설의 고향'을 같이 시청했다. 난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지금도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이 나곤 한다. 극장이 읍네에 나올 때 나가보면 긴 장대로 몇 군데를 고여서 흰 천막에 스크린을 둘러서 영화를 보는 방식이었다. 마치 전국 유랑극단이 하는 유랑극장인 셈이었다. 그게 '엄마 없는 하늘아래' '얄개시대' 이런 영화였다. 다 잃어버린 과거라 생각했는데 참 기억력이란 어마무시하게 무섭다. 아직도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이 글을 쓰면서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난다. 난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아마도 내 동년배들은 웃을 수도 있다. "진짜로 에이 거짓말이라고..." ㅋㅎ 하지만 사실인걸 어쩌랴! 앗 참 우리 엄마 이야기 하다가 샛네여! 전설의 고향은 엄청난 드라마였다. 침을 꼴딱 꼴딱 삼키면서 보는 드라마는 "내 다리 내놔!" 갑자기 나타나는 귀신의 모습에 탄성을 저지르곤 했었던 것 같다.


나는 시골초등학교 축구 선수출신이었다. 맵마다 축구선수는 4시간 운동을 하고 연습을 하여야 하는데 5학년때 어머니가 축구부를 그만두고 이제는 공부를 하라고 하셔서 억지로 축구부를 그만두었을 때였다. 그때는 축구부를 탈퇴하려면 축구부 선생에 빠따를 맞아야 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폭도 아니었는데 축구부를 그만둘 때 선생이 안된다고 이야기하셔서 학교에 어머니가 오게 되었다. 2층에서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는데 흰 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았는데 멀리서도 엄마가 너무 걱정된 빛을 하고 오셨고 손에는 두툼한 수건에 무언가를 넣으시고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축구부 선생님이 오시더니 교무실로 불렀고 갔더니만 책상 위에는 담배 거북선 1보루가 놓여 있었고 그 당시 가장 비싼 담배였다. 봉담배, 환희, 아리랑인가? 선생님은 "진짜 축구부 그만둘 거냐?" 예라고 대답하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자마자, 선생님은 일로 와바! 하고는 조폭도 아닌데 마대자루로 20대 엉덩이를 맞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개새끼였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정확한 답을 알기 어렵지만 그 당시 운동선수는 그 꼴리는 대로 했다. 미친놈 최** 살면서 그렇게 엉덩이를 아프게 맞아봤던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여간 그 삶 이후로 엉덩이 맞는 게 무섭지 않게 된 것이다. 왜 그렇게 때렸을까? 애들을 이유도 없이 지 기분 안 좋다고 이런 폭력의 시대가 있었다고 하는 게 지금 애들은 이해도 못할 것이다. 저녁에 갔는데 어머니가 이유도 없이 맞았냐? 엉덩이를 보시면서 얼마나 울어 주셨는지 잘 안 우는 분이셨는데 말수도 적으셨는데 "나쁜 선생님이구나!" 이 한마디 하시면서 얼마나 우셨는지 왜 그렇게 우셨었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데 진짜 나이가 들면서 많은 걸 알게 된다. 가끔 우리가 이해한다는 말이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얼마나 가벼운 말인지 이제 생각이 든다. 나의 엄마는 커다란 산처럼 느껴졌다. 어떤 비바람도 폭풍우도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내가 중학교 때부터 외지생활을 해올 때 참으로 여러 번 많은 기회들이 나를 망가뜨릴 수 있었는데 나는 참으로 잘 큰 거라 생각한다. 어머니 덕택이다. 그 거대한 산 가끔 우리 엄마는 말 벙어리신가? 생각도 하기도 했지만 거대한 산이셨다. 나의 폭풍우와 바람을 막아주셨던 그 거대한 산이 그 거대한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 나를 못 알아보신다. 가슴이 쓰리다. 엄마 모시고 제주도 한번 모시고 가야 하는데 말이다. 제주도 가 바닷바람 쏘이시고 엄마 좋아하는 회 한 접시 사다 드리고 싶은데 이제는 너무 늦었고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얼굴만 멍하니 보고 온다. 많은 말을 이야기하지만 잘 못 알아 드신다. 복날 술 처먹고 동네에서 트럭밑에서 자기도 하고, 당구장에서 터미널에서 싸우다가 군기교육대 가고 시동에서 싸워 코뼈를 부러 뜨린 애 아버지에게 서너 시간 같이 무릎 꿇고 사죄하시다가 같이 걸어 내려오는 언덕길에 가을 달이 얼마나 동그랗고 예쁘게 떠 있었는데 멀찌감치 앞으로 가시며 뒤로 돌아보시지 않고 걸으시던 나의 어머니 그 빠른 걸음을 걷던 우리 엄마가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무섭습니다. 자연스럽게 생각하려 하는데 언뜻언뜻 두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이 매일매일 그냥 허전하고 멍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 전 너무 침착해지고 어떤 일에도 화가 잘 안 나고 너무나 편안합니다. 너무나 침착해 가끔은 세상에서 진정 슬픈 일이 무엇인지 그냥 멍하기만 합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어머니의 흔적들이 생각납니다. 그 기억이 그 소망이 그 바람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그때, 아무런 욕심도 없이 천방지축 술 먹고 세상에 돌아다닐 때에 지금은 너무나 침착하고 평온합니다. 가끔 너무 힘없고 넋 없을 때 어머니의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난 어머니의 막내아들입니다. 사랑합니다. 조자 봉자 순자 님 나의 엄마 조자 봉자 순자 엄마 조봉순 엄마 엄마 보고 싶습니다. 사라진다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막내아들이 이렇게 기억합니다.


항상 입버릇처럼 막내한테는 너무 일찍 객지생활을 하게 한 것이 마음 아프다고 가슴 쓰리다고 이야기하신 나의 어머니 그렇게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꿋꿋하고 건강하게 잘 컸기 때문입니다. 엄마나 따스하게 잘 챙겨 주셔서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애간장이 탄다"라는 말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의미인지 조금ㅆ 조금ㅆ 느껴집니다. 평생 애간장 타면서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의 어머니

그렇게 키운 자식이 바로 저입니다. 가끔 이러한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오지만 그 한편에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저도 자식을 키우면서 항상 모자란 막내아들이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주저리주저리 적어 봅니다. 이 기억을 이 행복을 저에게 주신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오늘 이 벚꽃이 필 때 우리 어머니를 기억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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