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칼리뮤는 긴 이야기를 마친 뒤,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단 한순간도 그녀의 눈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겪었던 상실과 그로 인한 상처,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잠긴 눈동자 앞에, 감히 어떤 위로조차 쉽게 건넬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조용히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눈물로 젖어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해본 건 처음인 것 같네요."
그녀가 민망한 듯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칼리뮤. 정말 고마워요."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노라."
그녀가 눈가를 훔치며 투덜거리듯 말했지만, 그 말끝엔 묘한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당신이 겪은 상처들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아무도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 같지만, 당신의 감정이 고통을 만든 게 아니에요. 당신의 고통은... 배신과 상실, 혼자가 되었던 그 일들에서 비롯된 거죠...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만을 탓하지는 않아요."
그녀가 고개를 떨군 채 낮게 물었다.
"그럼... 누구의 잘못이죠?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거죠?"
"그 누구도 원망할 필요 없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린 모두 아프고, 무너지고, 끝없는 슬픔 속에 빠지기도 하지만… 삶은 끝나지 않아요. 포기하지 않는 한, 삶은 계속되고, 그 안에서 떠나간 사람들은 마음속에 남게 되죠... 분노와 슬픔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기쁨과 행복을 찾게 돼요."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러니 애써 지우려 하지 말아요. 애써 잊으려 하지도 말고요. 그저 서로 위로받고, 또 위로해 주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당신의 이야기 안에서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행복 안에 살아요, 칼리뮤."
한참 동안 그녀는 침묵했다. 그 눈동자는 나를 꿰뚫어 보듯 깊었고, 그 속에 억눌러 온 감정들이 출렁였다.
"사람들이... 가슴속에..."
칼리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들이 남긴 따뜻한 빛은 여전히 당신 안에 살아 있어요. 그러니 그들은 결코 떠난 게 아니에요."
그녀는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참아왔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얼굴을 파묻고 오랫동안 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녀가 오래도록, 마음속 깊은 어둠을 다 쏟아낼 때까지 울어주기를. 그 눈물이 그녀를 짓누른 상처를 씻어내고, 마침내 새벽 같은 빛을 불러오기를.
한참을 울던 칼리뮤는 마침내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눈가와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하얗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 고마워요, 노라. 정말로요."
그녀는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그러나 곧 목소리를 다잡으며 시선을 곧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순 없어요. 우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야 해요."
그녀는 예전의 자신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듯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조금씩 떨려왔고, 그녀의 눈빛엔 더 이상 차가운 얼음 같은 냉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엔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따뜻함을 갈구하는 불빛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옅은 미소와 함께,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떻게든 내일까지 도킹 터미널 집하장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어쩌면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낯선 목소리가 어둑한 모퉁이에서 울렸다.
나와 칼리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리암 아저씨였다.
"아저씨…?"
내가 놀라서 중얼거렸다.
"그… 나는 그저 네게 사과하고 싶었단다."
리암 아저씨는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너희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칼리뮤의 눈빛은 여전히 그를 향한 경계심에 가득 차있었다. 그녀의 어깨와 손끝은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고, 언제든지 그에게 달려들 준비가 된 맹수 같았다.
"우리 이야기를… 얼마나 들으신 거죠?"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처음부터, 모두."
그의 대답은 짧고 분명했다.
그 순간 칼리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태연한 척 고개를 돌리며 허공을 바라보는 척했지만, 자신의 가장 깊은 이야기와 모습을 남에게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도와주시겠다는 거죠?"
내가 다시 되물었다.
"저희가... 얼마나 위험한 일에 연루되어 있는지는, 알고 계시는 거예요?"
리암 아저씨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듣자 하니, 너희는 경찰들을 피해 도킹 터미널로 가야 하지. 그리고… 그걸 위해 경찰들의 시선을 돌려줄만한 사건이 필요하다, 맞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리암 아저씨는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짓했다.
"좋다. 그럼 날 따라오너라. 둘 다."
그가 묵묵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와 칼리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여전히 의심과 불신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기대의 흔적이 섞여 있었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리암 아저씨를 따라 도착한 곳은 식료품점 3층의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창밖으로는 낡고 빽빽한 빈민가의 골목들이 펼쳐졌고, 먼지 섞인 궤도기지의 조명이 유리창에 어슴푸레 반사되고 있었다.
리암은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탁자 쪽으로 걸어가더니, 옆에 놓인 낡은 전화기의 손잡이를 느긋하게 돌렸다. 옛 지구에서나 쓰였을 법한 구형 전술 유선전화기였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가르며 울렸다.
짧은 충전이 끝나자, 리암 아저씨느 수화기를 들고 낮게 입을 떼었다.
"날세… 응... 그래, 때가 된 것 같아. 오늘 밤 준비해 주게... 응, 있다가 보게..."
통화를 끝내고 돌아선 그의 눈빛은 이전과 달랐다. 묵직한 결의가 깃든 눈빛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이곳의 사람들은 주변의 이목을 끌 만한 일을 벌일 거야. 그동안 너는 이곳을 빠져나가면 돼."
리암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오랫동안 숨어서 품어온 염원... 너에게 행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계획을 조금 앞당기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오늘 밤, 우리는 혁명을 일으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