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칼리뮤는 지금 달리고 있다. 칠흑 같은 숲 속의 안개를 헤쳐가며 무언가를 간절히 찾아 헤매고 있었다. 숨이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부츠가 진흙을 밟을 때마다 젖은 흙냄새가 퍼졌고, 바람이 스쳐갈 때마다 머리칼이 흐릿한 안갯속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늘 보았던 익숙한 풍경이 칼리뮤의 앞을 가로막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등 돌린 사람들.'
숲의 중앙, 길을 가로막고 선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수십, 수백의 형체들이 등만을 보인 채,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지만, 그들은 절대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언제든 떠날 것이 준비된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고, 그녀도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발소리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 기척도, 호흡도, 생명의 온기도 없었다. 그저 정적의 공기만이 그들의 곁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칼리뮤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두려움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그녀의 가슴속에서 몸부림치듯 솟구쳤다. 알 수 없는 간절함이었다.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그저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비켜! 저리 비켜!”
칼리뮤는 검은 형체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그림자들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흔들렸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흑색의 물결처럼 그녀를 감싸며 점점 더 좁은 원을 그리며 다가왔다.
결국, 그 검은 형체들은 순식간에 그녀를 둘러싸버렸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그녀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모두 그들뿐이었다.
그 검은 파도 속에서, 칼리뮤는 서서히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제발...! 저리 비켜! 제발 사라져 버려...!"
칼리뮤는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싸매며 외쳤다. 이제 그녀의 외침은 거의 흐느끼는 소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뒤통수에서 눈 없는 시선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소리 없는 비난과 원망이, 뚫려있지 않는 그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너는 사랑받을 수 없어."
"그 누구도 너와 함께 할 수 없어."
"너와 함께 하는 이는 모두 같은 운명을 맞이해."
"외면. 소멸. 죽음."
"그게 너의 이름이야."
"너는 영원히 혼자야."
"너는, 죽음이자 어둠이야."
칼리뮤는 온몸을 떨며 귀를 막았다.
“그만…! 그만두라고!”
하지만 목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녀를 에워싼 검은 그림자들의 파도가 그녀의 모든 것을 서서히 삼켜버리고 있었다.
그 끝없이 쏟아지는 검은 형체들의 말에, 칼리뮤는 귀를 막고 길게 비명을 질렀다.
끝내, 그녀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다.
...
..
..
...
“혼자선 이겨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해요.”
그 모든 목소리를 가르며, 어디선가 들려온 한 음성이 칼리뮤의 귀를 스쳤다. 어둠을 찢는 그 목소리는,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따뜻했고, 그 어떤 공포보다도 분명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의 목소리였다.
“노라…!”
칼리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앞에, 안개를 뚫고 한 줄기 빛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 노라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은백색의 빛이 잔잔히 뿜어져 나와, 주위의 검은 형체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형체는 노라의 빛에 닿는 순간, 서서히 녹아 사라졌다.
칼리뮤는 노라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녀는 그 손을 꼭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노라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을 찾아야만 했어요.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저들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저는 너무 무서워서…”
칼리뮤는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불안과 혼란 속에 말을 더듬었다.
“진정해요, 칼리뮤.”
노라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의 모든 게 느껴져요.”
칼리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그 눈빛 속에는 거짓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주변의 검은 형체들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노라의 빛이 숲 속의 어둠을 밀어내고, 그들이 서 있던 길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모든 게 느껴진다고요…?”
칼리뮤가 낮게 물었다.
“그래요.”
노라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이 공간에 대한 기억, 당신의 감정, 그 고통까지도 모두 느껴져요. 우린 지금 서로 이어져 있어요.”
칼리뮤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만 놓아줘요. 내려놓아요. 당신의 그 모든 고통을.”
노라의 손이 칼리뮤의 손을 이끌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길이 빛으로 바뀌었다. 흙빛의 땅이 은색으로 번쩍이며, 그들이 걷는 길은 점점 더 밝아졌다.
“당신은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요.”
노라의 목소리가 잔잔히 이어졌다.
“아무도 당신에게 등을 돌린 적도 없어요. 이 길은 죽음이 아니라, 어둠이 아니라 희망이에요. 그리고 빛이에요.”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길 위의 빛이 더욱 강해졌고, 주변의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다.
노라는 발걸음을 멈추고 살며시 칼리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들어, 앞을 보라는 듯 눈짓했다.
칼리뮤가 고개를 들었다.
안개로 뒤덮였던 숲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대신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초록의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스치며 코끝을 간질였다. 태양빛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공기에는 생명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뮤는 두 눈가가 뜨겁게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시야가 물결처럼 흔들리며,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칼리뮤는 눈을 떴다.
희미한 빛이 시야를 스쳤고, 그녀는 자신의 눈가를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의 장면들은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숲, 안개, 그리고 노라의 목소리.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져 갔지만, 그 안에서 느꼈던 그 따뜻한 감정만큼은 가슴 깊숙이 새겨진 채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차가운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희미한 빛이 흔들리는 조종석 안, 자신의 다리에 덮여 있는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담요의 끝자락, 그 아래로 발이 네 개.
칼리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노라가 있었다. 그녀와 똑같은 자세로 몸을 일으킨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칼리뮤의 심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졌다.
노라의 품으로, 따뜻한 체온 속으로.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조용히 어깨를 떨었다.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눈물로 바뀌어 그의 가슴을 적셨다.
노라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끝이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은 동시에 느꼈다.
심장의 박동이,
맥박이,
그리고 숨결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그 따뜻한 연결의 감각이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