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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erence

# 64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Observer

에그리나 심장부, 석회암으로 둘러싸인 지도자 회의실은 아침의 지하수 냄새와 바람의 숨결이 얇게 스며들며 고요했다.
아이작은 조용히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노라의 계획을 곱씹고 있었다. 코라 침투, 지구의 실상 공개, 전쟁 없는 해결책…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기 위해 선택해 왔던 모든 결정을 천천히 되짚었다. 지켜야 했던 얼굴들, 버려야 했던 희망들,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폭력들. 그리고 지금, 그 무수한 선택의 끝에, 아주 가는 실 한 가닥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노라라는 청년이 가져온 다른 길.
그 길은 너무 얇아서 손으로 쥐면 끊어질 것 같았고, 끝이 어디로 닿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보다 희망에 더 가까운 것만큼은 분명했다.

아이작은 오랜만에 깊은숨을 내쉬었다. 지하수의 차가운 향이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는 엘렌을 호출했다. 잠시 뒤, 문의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고, 엘렌이 들어왔다.
아이작은 방금 전 노라와 칼리뮤가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엘렌에게 설명했다.
엘렌은 담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 이야기들을 들었다. 코라, GU의 부패, 반물질 폭탄, 진실을 드러낼 작전, 그리고 전쟁을 막는 단 하나의 경로. 말이 끝났을 때, 그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 엘렌, 그대 생각은?”

엘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하수 흐르는 소리만이 길게 이어졌다.
짧은 침묵을 지나, 예상보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단 한순간도 전쟁을 원했던 적은 없습니다."
엘렌의 목소리는 낮고 진실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다른 방법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지키려면, 총을 드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믿어왔죠.”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어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 다른 길이 있다면, 시도해 볼 가치는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건, 어쩌면 두려운 것이지만… 그래도 희망이니까요.”

아이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합의가 스며들었다.




지하 통신실의 거대한 광장. 돔처럼 둘러싼 석회벽이 반향을 되돌리며 웅장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전 대륙의 지도자들이 연결되었다.
유라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각 생존 구역의 심장과 연결된 스크린들이 푸른빛을 띠며 점차 켜져 갔다. 화면 속 지도자들은 피로와 경계, 그리고 희미한 기대가 섞인 얼굴들이었다. 그중 몇몇은 총성의 잔향을 등 뒤에 지고 온 전쟁지휘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새하얀 석회벽을 울리는 스피커 너머로 각 구역 대표들의 목소리가 차례로 흘러나왔다.

“대륙 회의를 개시합니다.”
의장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아이작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의 발소리가 홀 안의 모든 돌벽에 퍼져나갔다.
아이작은 노라의 계획을 명료하게 요약해 회의 전체에 전달했다.

“... 다시 말해, 코라에 침투하여, GU의 핵심 인물인 로쉬 박사를 제압하고…”
아이작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침착했다.
“지구의 실상을 인류 전체에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회의장은 즉시 요동쳤다.

“불가능한 계획이오!”
“외계인을 믿자는 말입니까?”
“지구의 자녀가 가진 무기를 써야 합니다!”
“전쟁 외엔 길이 없습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 서로 밀어내며 울렸다. 통신 잡음이 섞여 금속성 울림이 공기를 베었다.

아이작은 그 모든 소리 속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침묵이 가장 묵직한 의견이 되었다.
그러나, 그 회의에 마침표를 찍은 이는 아이작이 아니었다.

“전쟁은 우리가 원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엘렌이 의자에서 일어나 화면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녀의 말은 회의장을 일순 정적에 빠뜨렸다. 엘렌은 멈추지 않고, 더 명확하게 말했다.
“우린 선택지가 없어서 총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다른 선택지가 나타났습니다.”

빛이 엘렌의 얼굴을 반쯤 가리며 드리워졌다.
"그 선택지는 외계 문명의 기술이 아니라, 예전부터 우리가 갖고 있었던 힘입니다."

그녀의 단단한 눈빛이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만약 이 길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다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령관이 보기엔… 이것이 정말 가능합니까?”
유라시아 대표가 조용히 말했다.

엘렌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완전한 성공을 약속할 순 없지만... 전쟁보단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녀의 귓가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스쳤다. 엘렌은 그들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더욱 눈을 빛냈다.

“시도도 하지 않고 전쟁을 택한다면… 우린 이미 패배한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 모든 화면에서 깊은 침묵이 흘렀다.




회의장 안에서는 전쟁 외에 다른 선택을 인정하지 않는 강경한 목소리와, 희망이 있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는 신중한 목소리가 서로 뒤얽히고 있었다.
얼굴을 화면에 비춘 각 대륙의 지도자들은 서로의 말을 끊고 받아치며 혼란과 갈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각자의 억눌린 감정과 두려움이 스피커를 타고 울렸다. 누구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미세한 변화였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깊은숨을 내쉬며 양손을 엮은 채 앞을 응시했다.
전쟁의 돌파구라고 믿었던 계획이 다른 대체제가 나타났을 때 얼마나 취약한지, 회의장은 지금 그 깨달음을 아주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의장의 울림 있는 목소리가 혼란을 뚫고 회의장을 가르며 떨어졌다.
“좋습니다. 작전 검토를 승인합니다. 오세아니아 사령관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작전 계획을 작성해 보고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몇 초 후, 대륙 지도자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모니터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화면은 푸른빛에서 까만 암전으로 바뀌었다.
벽과 천장을 감싼 석회석이 아주 희미한 잔향을 되돌렸다.

엘렌은 숨을 내쉬었고, 아이작은 나지막이,
"부디 이 결정이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길..."
라고 기도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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