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돌

#슬럼프 #위로

by 소요

작년 10월 말에서 11월 초, 예상치 못한 슬럼프가 나를 덮쳤다. 마치 잔잔하던 호수 위로 큰 돌을 던진 듯 마음은 순식간에 흔들리고 뒤엉켰다. 반수를 했던 시절에도, 학창 시절에도 슬럼프라는 단어는 나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어두운 늪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지도 못했고 어쩌면 애써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슬럼프로부터 내 몸과 마음을 맡겼고 부정적인 생각만이 나를 휘감았다. 일어나자마자 항상 블루투스 음악을 틀고 신나게 하루를 준비하던 내가 침대에 누워 천장만 3시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가끔은 눈을 뜨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렀다. 그런 내가 낯설었고, 그래서 더 괴로웠다. 나는 늘 명량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노력과 열정으로 목표를 지금껏 이뤄왔으니까. 그런데 이 슬럼프는 그마저도 의심하게 만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은 이중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사실 올해 초에 세웠던 나만의 목표는 명확했다. ‘이중전공 선택 전, 나의 진로를 명확하게 정하자!!!’ 이를 이루기 위해 내가 꿈꿨던 모든 야망과 환상을 현실로 끌어내 직접 겪어보자는 다짐이었다. 경험의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며 내가 어떤 것에 설레고, 어떤 것에 열정이 없는지..그렇게 나만의 길을 찾고자 했다. 그렇기에 영화 제작, 다큐 제작, 영화제 기획, 창업, 마케팅, 기자 등 다양한 경험에 도전했고 나 자신을 시험해보는 시간들을 보냈다. 매 순간이 나를 더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내가 원하는 길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조급함 속에서 여전히 빈손이었다. 여전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 사실이 나를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끌고 갔다.


이중전공 선택이 다가왔을 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지. 왜 아직도 헤매고 있지’… 내가 지난 몇 달간 쌓아온 경험과 노력의 무게를 단숨에 무색하게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퍼즐 앞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나는 정답을 찾지 못한 채 혼란 속에 갇혔다. 내 미래가 앞으로 이렇게 덧없고 어려울까? 아니면 나는 여태 스스로를 속이며 잘못된 길을 걸어온 걸까? 나에게 슬럼프는 단순한 무기력함이 아니었다. 목표를 항상 세우고 달려가던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허무함과 불안이 차지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길조차 정말 옳은 길인지 확신이 없었다. 내가 하고 있는 선택들이 나를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엇다. 그렇게 몇 주를 보냈다.


나는 그저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기대며 나는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평소에 하고 있었던 일들이 늘 있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해도 결국 얻는 게 뭐지?’ 라는 안일한 의문은 내게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작은 성취조차 아무 의미 없이 다가왔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사라질 모래성처럼 여겨졌다. 더구나 ‘이 일이 정말 나중에 도움이 될까? 스펙으로 인정받을까?’ 라는 불안은 나를 더욱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그렇게 혼자서만 고민하며 무너져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오롯이 내 몫이라고 믿었기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간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부정은 나를 넘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느 날, 해월 팀에서 갑작스럽게 ‘팀 간의 소통’을 주제로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여름방학 때부터 열정을 쏟아부으며 함께 시작했던 서로 신뢰가 강한 창업 프로젝트다. 회의 장소에 도착하니 둥글게 둘러앉은 팀원들의 표정은 어딘가 심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듣게 되었다. ‘요즘 너한테 예전의 열정이 보이지 않아’, ‘의지가 없어보여’ 그 말들은 날카로웠다. 내가 나 자신을 책망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슴을 찔렀다. 슬럼프 속에서 팀장이었던 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말에 어떻게 대답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 깨달았다. 내 문제를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 부정적인 기운이 팀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원형으로 둘러앉았던 책상 위에 놓인 팀원들의 걱정 섞인 표정과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슬럼프는 혼자서만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내 안의 답답함과 무력감은 혼자 끌어안기엔 너무 컸고 다른 이들의 조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로. 그렇기에 내가 아는 선배님과 지인들을 만났다. 영화 감독을 하고 있는 현우 오빠, 사업을 하고 계시는 이청화 알럼나이, 과거에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관심있어 동문 강연에 참석했던 김지영 에미레이트 승무원,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만난 서영언니, 뭐 그냥 만났지만 같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주는 고딩 친구 민정이 등등.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그들은 또 나에게 너무 좋은 영향력을 주었다. ' 네가 이렇게 방황하고 있다는 건 네가 인생을 그만큼 애정하고 있다는거야 (서영언니)', '나를 믿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어.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의심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시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현우오빠)',모든 일은 희미한 스탬프처럼 처음에는 흐릿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꾸준히 찍다 보면 점점 선명해져 너의 색을 만들어갈 것이다.(이청화 알럼나이)',' 회사 채용은 반은 노력이고, 반은 운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기회는 언제든지 오고 네가 겪은 경험들은 절대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가진 모습이야말로 많은 서비스직에서 원하는 인재상이다. 단 하나만 보고 달리지 마라. 최대한 다양한 길을 보며 천천히 찾아가도 돼 (김지영 승무원님)'


그들과의 대화는 내게 위로와 동시에 새로운 동력을 주었다. 모두 각자의 길에서 불확실함과 싸우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길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노력과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내가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라도 괜찮으니 나만의 방향으로 다시 나아가보기로 했다.


그 만남들 이후로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비록 걸음은 더딜지라도 내 속도로 나아가 보겠다고. 어쩌면 이번 슬럼프는 내게 필요했던 잠깐의 멈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꿈을 찾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여전히 미래의 모습을 조금씩 탐색하고 있았던 것이다. 이번 슬럼프라는 늪이 지금의 나를 단단히 만들어줄 기초가 될 거라는 믿음을 품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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