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겨울의 끝

조혜진 소설 <<겨울을 지나가다>>

by 따시

『겨울을 지나가다』 조해진 소설,


“그 새벽에 마주 본 안개는 이 세계 바깥에서 보내오는 신비로운 신호 같았다고,(...)

세계의 바깥, 신비로운 신호, 그런 표현이 응축된 에너지로 흡수되어 내 마음의 어딘가에서 고요히, 아주 고요하게 폭발하는 듯했다, 폭죽처럼.”(p.81)

커튼을 걷었을 때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신비로웠다. 막 아침 안개가 제조되는 중이었다. 야트막한 산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서 연무기처럼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어제 종일 궂었던 날씨 때문인 것 같다. 비였다가 눈이었다가 다시 비가 내리는. 한파는 지났지만 아직은 겨울이다. 겨울에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겨울의 끝자락이라고 자연이 먼저 말해주는 것 같다.

안개가 바깥세상을 덮어버렸다. 마치 차광막을 친 것 같다. 투명한 유리창이 새삼 든든하다. 창이 있는 한 안개는 나를 향해 덤벼오지 못할 것이다. 새벽에 마주하는 안개는 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세상의 적들이 나를 향해 총공격 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쩌다 신비롭긴 하지만 두려울 때가 더 많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 더위는 에어컨 없이도 견딜만하다. 그런데 겨울 추위는 웬만해선 참을 수 없다. 애지중지하며 10년을 넘게 타던 인생 첫 차를 폐차시키는 대형 사고가 난 것은, 그해 겨울 두 번째 눈이 내린 아침이었다. 그래도 몸은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쓰린 속을 위로했다. 그 후, 눈이 오는 날은 절대로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다. 뒷걸음치다 발을 잘못 디뎌 넓적다리관절이 부러진 사고가 난 것은, 몇 년 전 초겨울이었다. 뼈와 뼈를 연결하는 지렛대를 심는 수술을 하고 침상에 누워 대나무 우듬지에 첫눈이 쌓이는 것을 바라봤다. 눈 내리는 땅에 발자국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수술하고 수년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겨울은 내게 앙갚음하듯이 흉터를 남겼다.

어찌 보면 겨울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섣달 스무이틀이라니. 내가 엄마 뱃속에서 양수를 터뜨리던 그 새벽은 자리끼가 꽁꽁 얼고 동이의 물이 쩡쩡 소리를 냈다고 한다. 겨울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뿜어내며 내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야근을 밥 먹듯 하던 계절도 겨울이다. 결산과 익년도 예산을 만드느라 손가락 끝이 짓무르도록 타자를 했다. 새해가 되면 새로 바뀌는 사안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추운 겨울밤 동고동락했던 난로는 사무실 중앙에서 벽으로 급기야 천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닥에서 천정이니 이만저만한 출세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수십 년 만에 겨우 책상 한 줄 뒤로 나앉았을 뿐이다. 어찌하랴. 그것이 나의 숙명이었던 것을 그렇게 긴 직장생활을 끝냈던 날도 겨울이다. 나는 아직 충분히 더 일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울타리 없는 거리에 내몰렸다.

맵싸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천변길을 날마다 걸었다. 마치 어디 직장에라도 가는 사람처럼 바쁘게. 엔틱카페까지 거리는 왕복 7킬로미터. 이 길의 이름은 소로길이다.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날마다 산책하던 거리. 너무 추운 날엔 뒤로 걸었다. 귀가 시리게 춥던 바람이 차차로 달큰하게 바뀌었다. 마른 갈색으로 천변에 서 있던 갈대가 스멀스멀 뒤채기 시작했다. 가생이가 하얗게 얼어있던 냇물도 슬슬 풀렸다. 겨울의 끝자락이라는 것을 바람이 말해준다. 긴 겨울을 참 잘 견디며 지나왔다고 나를 쓰다듬는다. 왜 하필 내게만 겨울이 더 혹독한지 원망하던 신께도 감사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지나간다.

봄은 희망이다.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켠다. 땅을 헤집고 씨앗을 뿌린다. 나의 씨앗은 읽기와 쓰기다. 쓰기 위해 읽고, 읽기 위해 쓴다. 이 과정에도 겨울은 또 올 거다. 그러면 나는 변함없이 소로길을 걸을 거다. 차가운 발자국 아래 겨울을 야무지게 묻으면서 봄으로 나갈 거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오고, 기필코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p.139)

그쯤은 나도 안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5화당신은 원하는 데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