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진 소설 <<겨울을 지나가다>>
『겨울을 지나가다』 조해진 소설,
“그 새벽에 마주 본 안개는 이 세계 바깥에서 보내오는 신비로운 신호 같았다고,(...)
세계의 바깥, 신비로운 신호, 그런 표현이 응축된 에너지로 흡수되어 내 마음의 어딘가에서 고요히, 아주 고요하게 폭발하는 듯했다, 폭죽처럼.”(p.81)
커튼을 걷었을 때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신비로웠다. 막 아침 안개가 제조되는 중이었다. 야트막한 산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서 연무기처럼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어제 종일 궂었던 날씨 때문인 것 같다. 비였다가 눈이었다가 다시 비가 내리는. 한파는 지났지만 아직은 겨울이다. 겨울에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겨울의 끝자락이라고 자연이 먼저 말해주는 것 같다.
안개가 바깥세상을 덮어버렸다. 마치 차광막을 친 것 같다. 투명한 유리창이 새삼 든든하다. 창이 있는 한 안개는 나를 향해 덤벼오지 못할 것이다. 새벽에 마주하는 안개는 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세상의 적들이 나를 향해 총공격 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쩌다 신비롭긴 하지만 두려울 때가 더 많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 더위는 에어컨 없이도 견딜만하다. 그런데 겨울 추위는 웬만해선 참을 수 없다. 애지중지하며 10년을 넘게 타던 인생 첫 차를 폐차시키는 대형 사고가 난 것은, 그해 겨울 두 번째 눈이 내린 아침이었다. 그래도 몸은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쓰린 속을 위로했다. 그 후, 눈이 오는 날은 절대로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다. 뒷걸음치다 발을 잘못 디뎌 넓적다리관절이 부러진 사고가 난 것은, 몇 년 전 초겨울이었다. 뼈와 뼈를 연결하는 지렛대를 심는 수술을 하고 침상에 누워 대나무 우듬지에 첫눈이 쌓이는 것을 바라봤다. 눈 내리는 땅에 발자국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수술하고 수년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겨울은 내게 앙갚음하듯이 흉터를 남겼다.
어찌 보면 겨울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섣달 스무이틀이라니. 내가 엄마 뱃속에서 양수를 터뜨리던 그 새벽은 자리끼가 꽁꽁 얼고 동이의 물이 쩡쩡 소리를 냈다고 한다. 겨울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뿜어내며 내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야근을 밥 먹듯 하던 계절도 겨울이다. 결산과 익년도 예산을 만드느라 손가락 끝이 짓무르도록 타자를 했다. 새해가 되면 새로 바뀌는 사안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추운 겨울밤 동고동락했던 난로는 사무실 중앙에서 벽으로 급기야 천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닥에서 천정이니 이만저만한 출세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수십 년 만에 겨우 책상 한 줄 뒤로 나앉았을 뿐이다. 어찌하랴. 그것이 나의 숙명이었던 것을 그렇게 긴 직장생활을 끝냈던 날도 겨울이다. 나는 아직 충분히 더 일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울타리 없는 거리에 내몰렸다.
맵싸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천변길을 날마다 걸었다. 마치 어디 직장에라도 가는 사람처럼 바쁘게. 엔틱카페까지 거리는 왕복 7킬로미터. 이 길의 이름은 소로길이다.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날마다 산책하던 거리. 너무 추운 날엔 뒤로 걸었다. 귀가 시리게 춥던 바람이 차차로 달큰하게 바뀌었다. 마른 갈색으로 천변에 서 있던 갈대가 스멀스멀 뒤채기 시작했다. 가생이가 하얗게 얼어있던 냇물도 슬슬 풀렸다. 겨울의 끝자락이라는 것을 바람이 말해준다. 긴 겨울을 참 잘 견디며 지나왔다고 나를 쓰다듬는다. 왜 하필 내게만 겨울이 더 혹독한지 원망하던 신께도 감사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지나간다.
봄은 희망이다.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켠다. 땅을 헤집고 씨앗을 뿌린다. 나의 씨앗은 읽기와 쓰기다. 쓰기 위해 읽고, 읽기 위해 쓴다. 이 과정에도 겨울은 또 올 거다. 그러면 나는 변함없이 소로길을 걸을 거다. 차가운 발자국 아래 겨울을 야무지게 묻으면서 봄으로 나갈 거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오고, 기필코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p.139)
그쯤은 나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