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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한 스푼

권여선 에세이 <<술꾼들의 모국어>>

by 따시

“봄에 싹텄던 것들은 여름에 왕성히 자라 마침내 가을이면 완숙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맛에 있어서만은 가을이 쇠락의 계절이 아니라 절정의 계절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절정은 단맛으로 표현된다. 모든 먹을거리는 가을에 가장 달콤해진다.”(p.143)


중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공항에 나간 큰딸이 톡을 보냈다. “외숙모 식혜 먹고 싶다.” 어린 시절 명절 때 외할머니 집에서 먹었던 식혜가 지금도 생각나는가 보다. 추석 연휴 둘째 날, 이른 시간인데도 도로에 차가 많다. 고속도로 입구로 가는 길은 벌써 가다 서기를 한다. 큰언니 집에 가는 중이다. 송편과 식혜를 해 놓았는데 감기로 꼼짝할 수 없으니 와서 좀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언니들 집을 돌고 나면 음식 서너 가지가 저절로 생긴다. 올 추석에는 간편하게 음식을 하기로 한다. 제사는 원래 안 했고, 큰아이는 사정상 추석 이후에나 오겠다고 했다. 시누이도 해외에 나간다고 하고, 시동생도 미리 다녀갔다.


간편하게 소갈비찜과 LA 갈비구이, 각종 전, 송편, 잡채, 도토리묵, 청포묵. 부세 보리굴비, 음 또 뭐가 있을까? 이렇게 메모장에 적어보지만 힘들거나 시간이 걸릴 것은 없다. 소갈비찜은 국내 유명한 명장이 만들어서 보내주었고, 보리굴비 역시 요리 연구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준 것이다. 전은 사시사철 전만 만드는 전문 전집에서 보내주었고, 송편은 언니 집에서 공수해 왔다. 핏물 뺀 LA갈비는 과학적으로 맛있게 만들어놓은 양념에 이미 버무려 숙성 중이다. 살맛 나는 세상이다.


시어머니 순자 씨가 명절에 빠지지 않고 만들던 음식은 녹두전이다. 결혼하던 첫 해. 설 명절 전날. 순자 씨가 “녹두전만 하면 되니까 힘들 것 없다”라고 말한다. 정오 무렵 방앗간에서 녹두를 갈아왔다고 보여 주는데, 들통에 1/4 정도의 양밖에 안 된다. “금방 하겠는걸” 의외로 적은 양에 만족해하며 전 부칠 준비를 한다. 바닥에 신문을 깔고 이동형 부루스타를 놓고, 대형 프라이팬을 올린다. 쟁반에 식용유와 뒤집게, 키친타올까지. 한 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다 끝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세팅한다. “어머니 전 부칠까요?” “아니다. 조금 기다려라. 아직 재료가 덜 준비되었다.” 그제야 순자 씨가 재료 준비를 시작한다.


녹두에는 쌀가루를 좀 넣어야 한다고 첨가. 신김치가 들어가야 제맛이라며 송송 썬 김치 한 포기 첨가. 간 돼지고기 양념에 볶아서 첨가. 삶은 숙주 첨가, 어슷하게 썬 대파, 말랑하게 삶은 고사리 등등 첨가. 그렇게 첨가를 거듭하니 애초 녹두의 5배가 넘는 양이 되어 들통으로 가득 찼다. 녹두는 거들 뿐. 녹두전의 진짜 재료들은 다른 것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그 어마어마한 재료의 양에 시작도 하기 전에 질려 버린린다.

정오부터 시작한 일은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혼자 하는 짬짬이 순자 씨 눈치를 보며 신랑이 달려들어 돕는다.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로 서너 층 쌓아 올리도록 만들었다. 내가 먹은 것 1장, 신랑이 먹은 것 2장. 손님용으로 사용한 것 서너 장. 나머지는 여기저기 나누어 주고 시누이들 귀갓길에 싸 보냈다. 이후로도 명절만 되면 순자 씨는 꼭 녹두전을 준비했다. 훗날 내가 모든 명절 음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을 때 녹두전부터 없애 버렸다. 남편이 가끔 녹두전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무시한다. 먹고 싶으면 사서 먹는다. 물론 맛은 다르지만 먹을만하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고 나면 내 손에서 다시 녹두전이 부활할지도 모르겠다. 저녁 내내 부쳐놓고 바쁘다는 아이들을 소집할 것이다. “해 놓은 음식도 와서 못 먹냐?”며, “언제든 먹고 싶으면 사 먹으면 된다.”라는 아이들과 옥신각신할 것이다.


딸은 엄마가 해 주던 음식을 그리면서 먹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 낸다. 어린 시절 입맛을 홀리던 그 음식을 드디어 만들어놓고 혼자서 뿌듯해한다. 음식은 그리움이다. 내가 수고하지 않으면 그리움은 내 속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나이다. 가을에 나는 식재료가 더 단맛을 내는 것처럼, 삶의 가을에서 만들어내는 음식 또한 더 맛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봄의 어설픈 맛과 여름의 강렬한 맛을 모두 지나고 드디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때가 가을이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낸 음식에 어떤 조미료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삶의 가을에 만드는 음식에는 세월이 만들어낸 특별한 조미료가 한 스푼 첨가된다. 그리움이라는 조미료다. 자연의 계절도 가을, 내 삶의 계절도 가을에 닿았다. 그리움 한 스푼 듬뿍 넣은 맛깔난 시(詩)를 요리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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