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리가 마지막으로 사무실 불을 끄고 나간 날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 사무실은 늘 그렇듯 어수선했다.
가방을 챙기는 사람, 급히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대리의 자리는 유독 비어 보였다.
서랍은 비워졌고
모니터 옆에 붙어 있던 메모지도 사라져 있었다.
오래 함께 일한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걸.
정대리는 늘 그랬듯 큰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짧은 인사였다.
문이 닫히고 나자 사무실은 다시 일상의 소음으로 채워졌다.
전화벨, 키보드 소리, 의자 끄는 소리.
그런데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하나가 빠져나갔다는 감각을.
차과장이 맡은 과제는 팀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일정은 빠듯했고, 고객사는 까다로웠다.
그 중심에 늘 정대리가 있었다.
회의에서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에 항상 정리를 했다.
흩어진 이야기를 한 줄로 묶고
문제가 커지기 전에 방향을 틀어주던 사람.
그래서 팀 안에는 이런 생각이 굳어 있었다.
정대리만 있으면 된다.
그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정대리가 떠난 뒤에야 알게 됐다.
정대리가 빠진 첫 월요일 아침.
회의실에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회의는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정대리가 먼저 입을 열었을 시간.
차과장이 말을 꺼냈지만
회의는 길어졌고 결론은 흐릿했다.
회의가 끝난 뒤
차과장은 조용히 이부장의 자리로 와 말했다.
“이부장님,
정대리 빠진 자리가 생각보다 큽니다.”
그날 이후 차과장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갔다.
메일은 쌓였고
고객 미팅에서는 답변이 늦어졌다.
정대리 머릿속에만 있던 맥락들이
문서로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씩 드러났다.
어느 날 늦은 저녁
차과장이 다시 이부장의 자리로 왔다.
“이부장님,
이 과제… 혼자서는 버겁습니다.”
이부장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정대리만큼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하던 일을
여러 사람이 나눌 수는 있습니다.”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했지만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그날 이후 정대리가 하던 일은 조용히 쪼개지기 시작했다.
회의 정리와 고객 질의 초안은 다른 팀원이 나눠 썼다.
문서 구조와 일정 일부는 박과장 팀에서 도와주기로 했다.
속도는 느려졌다.
대신 숨겨졌던 빈틈이 그대로 드러났다.
처음엔 다들 말했다.
“정대리님이 하시던 건데요…”
이부장은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실수는 계속 나왔다.
고객 요구를 다시 설명해야 했고
합의한 내용을 번복하기도 했다.
차과장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정대리 있었으면
이런 실수 안 했을 텐데요.”
이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도 실수는 있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 다 덮고 있었을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리해주는 사람을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가 생각을 꺼내놓는 자리가 됐다.
회의는 길어졌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가 과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차과장이 말했다.
“요즘은
이 과제가 제 머릿속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게 정상이라고 답해줬다.
중간 점검 자리에서
김상무도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위험해 보였는데
지금은 팀이 스스로 돌아가는 느낌이네요.”
퇴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차과장이 말했다.
“에이스가 빠지면
과제도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에이스가 있으면 편합니다.
하지만 에이스만 있으면 위험합니다.”
정대리가 떠난 자리는 분명 컸다.
한동안은 삐걱거렸고 모두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방식으로 메워졌다.
더 느리고, 더 투박하지만
누군가 빠져도 멈추지 않는 형태로.
그게 직장이라는 곳의 논리였다.
사람은 대체 불가능해 보이지만
일은 결국 돌아가게 되어 있다.
에이스가 떠나면 과제는 흔들린다.
하지만 그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팀은 혼자 서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직은 더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