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성, 김선- 우리 아이 낭독 혁명
몇년 전, 혁신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혁신학교의 모습이 다 같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근무한 곳은 교사들이 게을러지기 힘든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일례로 2학기 개학을 앞둔 여름방학의 마지막 며칠 동안 한 학년에 한명씩 전문가 선생님을 초빙하여 교사들과 만나게 했다. 우리는 모셔 온 전문가 선생님으로부터 생생한 현장 경험을 듣기도, 더 잘 가르칠 방법을 토의하기도, 또 가르치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마침 그때는 코로나 2년차로, 학생들의 학력 저하가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던 때였고 내가 만나는 학생들 역시 다를 바 없어 수업이 다소 힘들었다. 나와 우리 학년 선생님들은 이런 고민을 전문가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작년 아이들보다 수업 이해도가 확 낮아졌어요. 교과서가 어려울 지경인데 어떻게 수업을 해야하죠?"
라는 우리의 질문에 전문가 선생님께서는 다소 의외의 대답을 하셨다.
"코로나때문에 신체활동을 못 해서 그래요. 뛰어 놀아야 공부도 잘 되는데..."
이어 선생님께서는, "참, 소리내서 읽기 해보셨어요? 그거 효과 좋아요. 저희 학교 학생들 영상 보실래요?" 하며 휴대폰에 저장된 짧은 영상을 하나 보여주셨다. 영상엔 1교시 시작 전 아침 독서 시간의 교실 풍경이 담겼는데 특이한 점은 아이들이 각자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각자의 책이 다 다르므로 당연히 입을 맞춘 하나의 소리가 아니었다. 저마다 다른 내용을, 다른 속도와 크기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추천해주셨는데, 당시 2학년을 지도하고 또 네살 아이를 키우고 있던 나는 그 분의 말씀에 귀가 번쩍 뜨여 그날 바로 책을 구입했다. 고영성, 김선 작가의 '우리 아이 낭독혁명'이다.
그 날 그 선생님의 가르침에 우리는 확실히 고무되었다. 한 선생님은 그날 이후 금요일마다 소리내어 책을 읽고 부모님 확인을 받아오는 것을 과제로 내셨는데 학기 말 한 학부모에게 좋은 과제를 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다고 들었으며 나 역시 우리 반에서 소리내어 책 읽는 시간을 급격하게 늘렸다. 아이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방역 수칙 지키기가 그 무엇보다 중시되던 때였지만 아이들이 소리내어 책 읽는 순간만은 거리두기 전으로 돌아간 듯 활기가 넘쳤다.
처음에 '너무 시끄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였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소리내어 읽기는 효과가 있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인간의 강력한 발달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듣기가 읽기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그렇다면 아이는 언제부터 들을 수 있을까? 태아 6개월부터 들을 수 있다. 엄마 아빠의 목소리, 양수 소리, 엄마의 심장소리 등을 듣는다. 그래서 이때부터 태교가 진정 의미가 있게 된다. 신생아들은 엄마가 태교를 할 때 자주 들려주던 책의 구절을 들으면 젖을 더 빨리 빠는 경향이 있다. 태아 때 이미 청각능력이 발달되므로 엄마의 낭독 소리를 귀담아들었던 것이다. (p. 58)
한 때 궁금했던 이야기이다. 뱃속의 아기는 정말 내가 하는 말을 들을까? 하는 생각을 임신 시절 여러번 했는데 뒤늦게 답을 알게 되었다. 6개월 후부터는 태아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뇌라는 컴퓨터에는 '들으면 말하라'는 프로그램은 이미 내장되어 있지만, '문자를 보면 이해하라'는 프로그램은 없다. 실제 뇌는 글자를 읽는 것을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p.59)
그럼, 독서와 뇌 발달상의 관계를 모른 상태에서 부모가 5세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부모가 한글을 외우게 하면, 아이는 아직 뇌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열심히 외운다. 그렇게 해서 겨우 글자를 좀 외우면 부모들은 외운 글자를 확인하기 위해서 책을 소리내어 읽게 한다. 이때 5세 아이들은 어떤 책을 소리내어 읽을까? 부모가 2~3세에 읽어주던 책을 소리내어 읽는다. 한 쪽당 한두 문장밖에 없고, 문장도 짧고 간단하며, 이미 아이들이 '알고'있는 어휘들이 나온다. 5세 정도 아이들은 아직 뇌 발달상 집중력이 높지 않다. 다시 말해 하루에 학습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데, 바로 그 시간에 자신이 아는 어휘와 너무 쉬운 문장을 읽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부모가 책을 읽어주면 어떻게 될까? 5세 아이들은 한 쪽당 서너 문장이 있는 책을 들을 수 있다. 그 이상도 가능하다. 글이 많다 보니 어휘가 다양하며 문장도 길다. (p.63)
나와 동생의 경우가 이 예에 딱 들어맞는다. 나는 첫째딸로, 열정이 넘쳤던 유치원 교사였던 엄마가 세살때부터 내게 글자 카드를 보여줬다고 한다. 엄마의 각고의 노력 끝에 나는 서너살때 한글을 뗐다고 하며 그래서 천재인줄 알았다는 전설같은 얘기가 한동안 나를 따라다녀 힘들었다. 당연히 나는 천재가 아니었으나 자라면서 늘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반면 동생은 학교 입학 전까지도 한글을 몰라 엄마의 애를 태웠다고 한다. 다행히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한글을 대충 뗐다고 하지만 나에 비하면 꽤 늦게 익힌 셈이다.
그럼 지금 동생과 나의 독서력은 어떨까? 동생이 내게 감명깊게 읽었다는 책을 나는 잘 이해가 안되어서 끝내 다 못 읽기도 했던 것을 보면 독서력은 동생의 압승이다. 정독, 다독 모두 단연 나를 앞서며 지금은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개월 수에 상관없이 아는 어휘수가 많고 어휘 처리속도가 빠른 아이의 경우, 엄마가 아이와의 대화에서 문장과 어휘수를 훨씬 더 많이 사용했다. 다시 말해 엄마가 평소 아이에게 사용하는 문장이나 어휘의 종류에 따라서 아이의 어휘 습득, 언어발달이 달라지는 것이다. (p.87)
아이가 돌도 안되었을 무렵, 친한 언니가 집에 놀러왔다. 언니는 나와 아이가 고요하게 있는 모습을 보며 내게 말했다. "애가 똑똑해지려면 엄마가 수다쟁이가 되어야 해. 너 말 별로 없는거 아는데 힘들더라도 애한테 말을 많이 걸어줘." 언니의 조언대로 나는 아이에게 말을 많이 거는 엄마로 변했고 이 구절을 읽고 나서는 아이에게 유아어(치카치카, 붕붕 등)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1학년이 된 아이는 어휘력이 꾸준히 성장하여 끝말잇기 놀이를 할때 위장전입, 주상절리, 신전, 행방불명같이 나도 깜짝 놀랄만한 어려운 한자어를 말하기도 한다.
딸은 동화책보다 자연과학책을 좋아한다. 그날 이후 쪽당 15줄이 넘는 자연과학책을 읽어주었고 아이는 잘 따라왔다. 물론 목이 아프긴 했지만, 책 읽기에 성장한 아이를 보면 그런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략) 못해도 7세까지는 아이가 직접 책을 읽는 시간보다 부모가 읽어주는 시간이 많을수록 무조건 좋다. 그리고 부모가 읽어주는 책의 수준을 꾸준히 올려주는 것을 잊지 말자. 벌써 15줄의 책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부모가 5~7줄의 책만 읽어준다면 아이의 잠재력을 다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p.92)
아이가 어렸던 시절 아이 친구나 친척 등 또래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줘보면 한 4세 정도만 되어도 듣는 능력에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것도 어휘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월령이 같아도 길고 복잡한 문장을 잘 듣고 이해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짧고 단순한 문장만 받아들이는 아이도 있었다. 한글 익히기나 글쓰기처럼 우리 눈에 아웃풋이 보이진 않지만 아이들의 듣는 능력은 꾸준히 향상되고 있는 것이다. 그 능력을 자극해주자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초보 해독가가 달성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1. 문자와 음성이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 2. 음절 분할과 음소 인지를 제대로 하는 것 3. 단어를 읽을 때 불규칙성을 체화하는 것 4. 문장을 유창하게 읽어내는 것 5. 글을 언제 다시 읽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
그렇다면 초보 독서가가 어떻게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부모나 교사가 함께 있는 상태에서 책을 '큰소리로 읽는 것'이다. (중략) 단, 낭독을 할 때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아이가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부모가 책 읽어주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아이가 글을 유창하게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 낭독을 병행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묵독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해서 낭독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낭독이 주는 유익이 매우 크므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도 병행하는 것이 좋다.(p.123~124)
개인차가 있지만 초저학년은 대개 묵독이 가능하다. 그럼 부모는 '읽기 독립이 되었구나!' 하며 낭독을 소홀히 하기가 쉽다. (사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낭독이 주는 유익이 크므로 계속 이어가라는 것. 그렇다면 낭독의 구체적인 유익은 무엇일까?
가천의과대학교 뇌과학연구소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묵독을 할 때와 낭독을 할 때, 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실험을 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묵독을 할 때보다 낭독을 할 때,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이 더 활성화되었다. 다시 말해 낭독을 할 때 독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뇌 부위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뇌파를 측정했을 때에도 묵독을 할 때보다 낭독을 할 때 세타파와 델타파 등 저주파가 더 많이 측정되었다. 저주하는 우리가 집중할 때 나오는 뇌파다. 결국 아이들이 묵독을 할 때보다 낭독을 할 때 주의집중을 더 잘하게 된다는 것이다. (p.140)
난 수업할때 어떤 과목이든 소리내어 읽어보자는 말을 잘 하는데 소리내어 읽으면 아이들이 집중을 더 잘하는것 같아서였다. 근데 그게 그냥 느낌이 아니라 진짜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다니, 앞으로도 소리내어 읽기를 자주 시켜야겠다. 저자는 이렇게 뇌의 활성화 이유 외에도 피드백을 할 수 있다는 것, 난독 치료에 유리하다는 것을 낭독의 장점으로 꼽는다.
이 글에 다 옮기진 못했지만 또 흥미로웠던 것은 듣기 천재인 인간의 발달 특성상 이중언어로 자란 아이는 단일 언어를 쓰는 아이에 비해 언어 능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이 상대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부분이었다. 학년말이 되면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원아모집이 안되어 걱정인데 영어유치원은 가을부터 마감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로 이중언어에 관심이 많은 한편 영어 유치원을 걱정하는 의견들도 많은 요즘, 아이의 유치원으로 고민하는 부모님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아이가 네살일 때 이 책을 읽었는데, 그때는 아이의 한글에 대해 고민이 많을 때였다. 네살이면 너무 이른 것 아니냐 싶겠지만 내 주변은 그렇지 않았다. 주변에 이미 한글을 다 뗀 아이도 있었고 다 떼진 못했더라도 학습지 등을 하며 열심히 달리는 경우도 많았기에 나의 고민이 깊어지던 때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덕에 그런 분위기에 많이 흔들리지 않고 아이의 속도를 차분하게 기다려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한글을 일찍 읽은 아이들이 지금 결코 더 어휘력이 앞서거나 독서력이 높지 않으며 그 시절 읽기 능력 대신 듣기 능력 향상에 집중하여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을 늘린 것이 올바른 방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복직을 반년 정도 남긴 지금,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보며 마음을 다잡아보았다. 어떤 학년을 맡더라도 초보 독서가인 아이들에게 낭독의 시간을 많이 주리라 다짐한다. 더불어 교사인 내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 아이들은 듣기 천재이며 묵독보다 낭독이 필요한 발달 단계임을 새기고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