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웃음
아이가 스케이트를 배운 지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더위가 기승이던 8월 어느 날, 레슨을 시작하기 전 스케이트 끈을 묶어 주시던 선생님께서 대회에 나갈 것을 권하셨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이도 나도 흔쾌히 대답할 수 없었다. 대회가 있을 토요일에 아이의 사교육 일정이 빡빡하다는 핑계를 댔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우리 아들은 운동신경이 없다. 부모라면 으레 하는 겸손이 아니라 정말 없다. 사람의 운동신경이 정규분포 곡선을 그린다면 우리 아이는 왼쪽 끄트머리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근데 뭐, 유전자가 어디 가겠는가. 학창시절 내내 잘 나오면 4급, 보통은 5급이었던 나의 체력검사 급수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겸허해지며 남편의 학창시절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들었으니 우리 아들의 운동신경은 다 우리 책임이다. 그러니 억울하지 않다. 다만 아이를 키우는 내내 한번씩 민망한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을 뿐.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시절, 워킹맘인 나는 아이의 유치원 카페에 매일같이 들어가 업로드된 사진과 영상을 보았다. 그런데 신체활동 수업 영상을 볼 때면 남편도 나도 말이 없어지곤 했다. 왜 얘는 징검다리를 깡총발로 가볍게 건너질 못하는가, 왜 터널을 저리도 힘겹게 통과하는가. 무엇보다 왜 다른 아이들의 움직임과 묘하게 다른가. 왜 어딘지 모르게 둔하고 몸을 자기 의지대로 쓰지 못하는가!
그렇게 아이의 운동신경을 일찍부터 자각하고 운동에 대해 기대는 갖지 않는 대신, 일찍 그리고 꾸준히 운동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아이 여섯살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는 유치원 엄마가 함께 스케이트 그룹 레슨을 받지 않겠냐고 권했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첫 수업 날, 갓 태어난 기린처럼 한 발짝도 떼기 힘들어 하는 아이의 움직임을 보고 그 엄마와 나는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찝찝함이 없는, 정말이지 순도 100%의 웃음이었다. 당연히 아이는 함께 시작한 친구들보다 진도가 확연히 느렸다. 수업을 마치고 얼음판을 나오시며 선생님께서는 "이준이 엄마는 맘을 좀 비우세요.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고."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고 나는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선생님보다 훨씬 먼저 내가 마음을 헐렁하게 비워놓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지나 초등 입학을 기점으로 함께 하던 아이들이 모두 스케이트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우리 아이는 계속 이어나갔다. 아이의 진도가 느렸던 탓에 그만두기에는 너무 애매했던 것이다. 그렇게 1주일에 한 번, 가늘고 길게 이어가던 시간 동안 아이의 다리에 힘이 생겼고 자세는 안정되어갔다. 비슷한 기간만큼 배운 다른 아이들은 이미 학교 마크가 새겨진 선수용 수트를 입을 만큼의 실력이 되었지만 괜찮았다. 아이는 분명 새끼 기린에서 많이 진화된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경쟁 위주의 대회라면 저도 권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은 축제 같은 대회예요.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결국 아이는 출전을 결심했고 몇 번의 연습이 있었다. 선수용 수트를 입고 빙판을 활주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시원한 모습의 아이들에 비해 우리 아이는 확실히 둔탁해 보였다. 고작 10년도 살지 않은 아이들의 신체 역량이 이토록 다르다니, 현타가 오고 말았다. 그러다 딸이 스케이트에 재능이 있어서 선수 준비를 오래 하다가 공부를 늦게 시작해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선배샘의 말씀이 떠오르자, 헷갈릴수가 없는 운동 능력을 가진 아이에게 고마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대회 당일, 평소답지 않게 꼭두새벽에 일어난 아이의 볼이 발그레하고 이마가 따뜻했다. 체온계로 확인하니 약한 열이 있었다. 평소에 잘 아프지 않는 아이가 이러니 불안해진 남편과 나는 그냥 오늘 대회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자고 제안해봤지만 아이는 한사코 나가겠다고 했다. 그래, 까짓거 오늘 하루 고생하는거지 뭐! 단단한 마음을 먹고 나와 아이는 대회장으로 향했다.
계주도, 300m도 나가지 않은 우리 아이는 꽤 오랜 시간을 빙상장 입구 돗자리에서 대기해야 했지만 그저 즐거웠다. 같이 나가는 또래 친구들과 금세 친해져서 서로 책을 빌려주며 읽고 함께 간식을 나눠먹었다. 지켜보던 다른 부모님들이 "쟤네는 소풍 온 것 같다, 먹으러 왔나보다. "하실 정도였다.
긴 기다림 끝에 아이의 차례가 다가왔다. 아이는 200m 시합에서 스타팅이 늦었고 심지어 중간에 넘어지기도 했지만 일어나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넘었다. 3명 중에 3등이었지만 괜찮았다. 꼴찌를 해도, 넘어져도 울지 않은 아이가 기특할 뿐이었다. 다음 100m 시합에선 넘어지지도 않고 2등을 했다. 주변에 계신 부모님들이 진심어린 축하를 건네셨고 나도 마음 놓고 박수를 쳤다. 이렇게 아이의 첫 스케이트 대회가 끝났다.
근무를 마치고 우리보다 늦게 집에 온 남편이 '아침 일찍부터 고생했겠다.'며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나는 정말이지 괜찮았다. 실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지상훈련을 하는 아이들의 투지, 대회장을 가득 메운 부모님과 선생님의 열정, 처음 보는 나와 아이에게 흔쾌히 간식을 나눠주며 큰 소리로 응원해주는 따뜻한 어른들,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금세 깔깔거리며 친해지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오히려 에너지가 빵빵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이 어느 위치에 있든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어느새 몸과 마음이 성큼 커진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하게 벅차올랐다. "엄마, 스케이트 대회 또 나가고 싶어요." 라고 하는 아이를 보니 아이도 나처럼 뭔가를 가득 채워왔구나 생각했다.
대회가 끝나고 하루가 지났지만 아이의 영상을 보고 또 본다. 외울 정도로 익숙해진 영상을 자꾸 보는 이유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대회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미 고슴도치 모드로 살아야겠다. 육아에는 가끔 이렇게 아이가 한없이 예뻐보이는 순간이 있어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