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의 불안과 조급함은 아니었을까요?
나의 역할이 달라졌음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되는 장소는 '교문'이다. 올해 휴직을 하며 나는 교문 안에 있던 교사에서 교문 밖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학부모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교문 안에서는 교문 밖의 상황을 잘 알 수 없다. 아침에 한번 교문 안으로 들어가면 퇴근 전까진 나올 일이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문 밖에서도 교문 안의 상황을 잘 알 수 없다. 그저 미어캣처럼 무리지어 고개를 주욱 빼고 아이를 기다리는 것이 올해 내가 해야 할 역할이다. 또한 교문 밖 뿐 아니라 놀이터, 학원 정문 밖 등이 나의 소속이 되었다. 교문 밖, 놀이터, 학원 정문 밖에서 있노라면 듣고 싶지 않아도 내 귀로 들어와 꽂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교문 안에서는 짐작만 할 뿐 결코 몰랐을 이야기들, 교사를 흉보는 얘기가 그것이다.
"우리반 담임은 입학식 사진을 며칠이나 지나서 올려줬어. 옆반은 입학식 당일에 올려줬는데. 이거 어떻게 생각해?"
(나는 복직해도 절대 사진 안올려야지. 역시 좋은 소리를 못 듣네)
"너무 화가 나. 오늘 담임이 우리 딸한테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못 가게 했대."
(애 말만 듣고 열내시기 전에 무슨 일이었는지 선생님께 여쭤 보심이...)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내 마음도 잔잔하진 않았다. 그 담임들을 대변하여 억울함이 막 불끈 솟았다. 게다가 이 두 분은 절대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앞으로는 사진을 당일에 올려달라.'거나 '왜 화장실을 못 가게 하셨나요?'라고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담임은 대화의 소잿거리가 되었을 뿐, 역시 교사는 돈 못버는 비호감 연예인이 맞나보다, 라며 씁쓸해했다.
이렇게 교문 밖에서도 교문 안의 정체성을 굳게 지니고 있는 나의 마음이 흔들리는 사건이 있었다. 아이가 다니는 영어학원은 매달 말 성취도를 테스트하는 시험을 보는데, 시험 결과가 앱으로 미리 공개된 후 한국인 선생님이 개별 전화를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개별 전화를 드리겠습니다.'라는 공지가 뜬 지 일주일이 되어가는데도 전화가 오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놀이터에서 만난, 다른 학원을 보내는 엄마들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고 하여 더 불퉁한 마음이 들었다. 내친 김에 "언니, 우리 학원은 문제가 있긴 있어요. 월말 테스트 전화 아직도 안왔지 뭐예요. 이러다 4월 말 되겠어요."하며 흉보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렇다며 동조해주는 동지들(?)의 응원에 나는 더욱 내 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개별 성적 안내 전화가 오면 이런 학부모 소통에 관한 클레임을 제기하리라 마음먹은 찰나, 무언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학부모 소통'이라... 가시가 박힌 듯한 기억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지금에야 교육청 연락 어플이나 하이클래스 등의 창구가 생기고 교사의 업무 외 시간 보호가 화두가 되어 교사 개인 폰번호 공개를 지양하고 있지만, 불과 몇 년전만 해도 교사의 개인 번호 공개는 당연했다. 그것이 불편한 나와 같은 교사들은 사비를 들여 투넘버 혹은 투폰을 쓰곤 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당연하던 4년 전, 나와 나이 차가 크지 않으며 매우 스마트한 부장님과 같은 학년을 하게 되었는데 부장님께서는 우리 학년에게 올해는 개인 번호를 공개하지 말고 업무 시간에 교실로 걸려온 전화만 받자고 제안하셨다. 우리는 모두 부장님의 말씀에 동조했으나 그에 불만을 가진 학부모가 교감실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때 교감선생님께서는,
"개인 번호를 공개하지 않으면 2학년은 학부모님들과 소통을 어떻게 하나요?"라며 우리의 번호를 학부모에게 공개할 것을 은근히 종용하셨고 결국 우리 학년은 뜻을 굽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끼리 있는 자리에서는 교감선생님이 말씀하신 '소통'이 대체 뭔가, 출결에 대한 연락은 당일에 교실 전화로 받으면 충분하고 학생이 다치거나 하는 등 학교에서 일어난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하교 후 우리가 먼저 학부모에게 연락드리는데 그걸 넘어서는 다급하고 꼭 필요한 소통이 대체 뭐가 있냐며 억울해했더랬다. 일요일에 아이 터닝메카드 찾아달라는 학부모의 문자, 우리 애 예뻐해달라며 술에 취한 목소리로 늦은 저녁에 걸려왔던 학부모의 전화 등 그간 업무 외 시간에 받은 연락들은 소통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으니 말이다.
이 기억이 소환되자 왜 '학부모의 소통'이라는 말이 내게 왜 유독 불편했는지 이해가 됨과 동시에 소통 클레임의 계획을 고이 접어 마음속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이내 맑은 생각이 머리에 닿았다.
'월말 테스트의 결과지가 이미 나왔는데 선생님의 전화까지 즉시 올 필요가 있는가?'
'한 달에 한 번보다 더 잦은 빈도로 학원 선생님께 전화가 올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애초에 한 달보다 짧은 시간에 아이의 실력이 내가 알아야 할만큼 변하는가?'
모든 질문의 답은 '아니요' 혹은 '없다'였다. 고3 수험생이면 또 몰라, 초1 아이의 영어 학습이 그리 촌각을 다투는 일은 아니지. 그러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전화가 언제 오는지를 기다리고 온 에너지를 불만에 모으는 게 아니라 아이와의 시간에 집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빨리 전화를 받고 싶었던 내 마음은 어서 아이의 성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 나의 조급함과 '혹시 내가 리스트에서 빠진건가?'하는 터무니없는 불안, 혹은 아이에 대한 칭찬을 듣고 싶은 나의 욕구에 불과하며 전화가 오든 말든 아이의 학습에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선생님으로부터의 전화는 이 깨달음으로부터 늦지 않게 걸려 왔으며 나는 소통이라는 말의 ㅅ도 꺼내지 않고 예의 바르게 통화를 마쳤다. 뒷맛이 몹시 개운하고 산뜻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이었다. 선생님께 무례한 요구를 할뻔 했던 것을 문턱에서 가까스로 막았으니.
강력한 불만과 억울함의 늪에 빠지기 전에 마음을 다른 곳에 두는 연습을 해 본다. 몇년 후면 사라질 아이의 귀여움이라든지, 오늘 저녁에 먹을 닭볶음탕이라든지, 어제의 야구경기라든지(오랜만에 대승했음!) 나의 마음을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들 위에 올려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