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우울증의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사실 무언가를 명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우울증을 겪는 사람은 의지가 부족하다는 낙인을 찍었다. 그럼 우울증은 ‘마음’의 병일까? 인간에게 나타나는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질병은 ‘영혼’이나 정신 또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뇌라는 물리적 실체의 문제이다. 우울증이 뇌의 대사물질 분비와 관련된 질환이라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0년대이다. 우울증이 세로토닌(serotonin) 부족으로 인한 것이라는 모노아민(monoamine) 이론도 나왔다.
우울증은 유전적인 요인도 있다. 주관적 행복감(subjective well-being, SWB)은 스스로 느끼는 행복과 삶의 만족을 의미한다. 연구에 의하면 주관적 행복감은 약 40%가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된다. 우울증, 양극성장애 1형, 조현병, 거식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대마초 사용 장애, 자폐 스펙트럼장애 등 7개 정신장애가 주관적 행복도와 유전변이를 공유한다. 특히 우울증과 연관 있는 유전변이 중 93%가 주관적 행복과도 관련이 있다. 아무리 약물로 우울증을 치료해도 유전변이에까지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주관적 행복감을 개선하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치료 후에도 행복감이 좋아지지 않는 환자가 많다.
우울증은 면역체계와도 관련이 있다. 2025년에 나온 연구에 의하면 우울증은 세포에서 일어난 면역 불균형이 원인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면역과 신경의 상호작용 균형이 무너져 있다. 뇌세포들이 신호를 주고받는 단백질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있고, 몸의 면역 반응을 강하게 만드는 단백질도 증가해 있다. 우울증 환자의 면역세포 안에는 염증 반응이 더 쉽고 강하게 일어나도록 만드는 유전자 변화가 있다. 과도하게 활성화된 면역이 염증을 일으키고 우울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우울증 환자들의 신경 세포는 일반인보다 더 빨리 죽는다. 원래 신경세포가 만들어지면서 일부 신경세포는 죽지만,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이는 뇌 기능과 면역 기능이 모두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균형이 깨진 상태다. 우울증이 몸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이것은 우울증 환자의 공통된 특징일 뿐, 인과관계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관관계로 보아 의미가 있다.
https://advanced.onlinelibrary.wiley.com/doi/10.1002/advs.202508383
에드워드 불모어(Edward Bullmore)는 자신의 저서『염증에 걸린 마음』에서 사이토카인(cytokine)이라는 혈액 속 염증 단백질이 뇌로 신호를 보내 인간의 감정과 생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몸 안의 염증은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변화시켜 감정과 행동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설명이다. 우울증이 심리적 문제와 살아온 환경에 의해 주로 형성된다는 기존의 심리학적 접근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염증이 많다는 연구는 많다. 암 수술이나 출산 이후 회복 과정에서 일부 환자들에게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와 같은 증상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우울증은 살면서 겪은 경험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왕따’로 인한 것이 크다. 어릴 적에 당했던 ‘왕따’로 인한 트라우마는 성인이 돼서도 심각한 후유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2배에 이른다. 우울증 환자들이 겪은 트라우마의 유형은 심리적 외상, 정서적 방치, 신체적 외상, 왕따, 성폭력 등이었다. 이 가운데 성인 이후 발병한 우울증과 가장 큰 연관성을 보인 것은 ‘왕따’였다. 성인이 되어 우울증을 앓을 확률을 비교하면 왕따를 겪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1.84배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다른 트라우마는 우울증 발병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정도의 인과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라우마의 종류가 여러 개일수록 우울증 발병 위험이 더 커져 다른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렵다. 트라우마의 종류가 5개 이상인 사람의 우울증 발병 위험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은 사람의 26배에 이른다. 따라서 왕따를 당한 사람이 있으면 심리적 상태를 면밀히 지켜보고, 상담을 통해 조기에 도움을 받아야만 장기간 이어지는 후유증을 예방할 수 있다. 어릴 적 왕따 경험은 쉽사리 잊히지도 않을뿐더러 심한 경우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힐 수 있다. 특히 왕따 피해자는 성인이 되어서도 동료나 윗사람과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쉽게 예민해지는 경우가 많다. 피해 자체를 예방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일단 피해가 발생하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다.
우울증 환자는 아세틸엘카르니틴(Acetyl-L-carnitine)의 혈중 농도가 정상인보다 낮다. 우울증 증상이 심각한 사람은 가장 낮은 아세틸엘카르니틴 수치를 보였다. 어린 시절 학대, 방치, 가난, 폭력 등에 노출된 사람은 이 수치가 낮았다. 뇌 신경세포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신경 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생성을 촉진시켜 주는 아세틸엘카르니틴은 약국에서도 판매되고 있는 물질이다. 동물실험에서 아세틸엘카르니틴 결핍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있었다. 이번 연구는 처음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 확인한 것이다. 인간은 평생 약 15% 내외가 우울증을 앓을 수 있지만 약을 처방받는 환자의 반 정도만 효과가 있고 부작용도 있어 장복이 어렵다. 연구진은 우울증의 중요한 부분을 발견했지만, 그 물질을 보충해도 실제 환자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는지 여부는 아직 검증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