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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Feb 19. 2021

여자들의 무질서

캐롤 페이트먼, <여자들의 무질서>/이영재, <제국 일본의 조선 영화>

캐롤 페이트먼, 이평화 이성민 옮김, 여자들의 무질서, 도서출판 b, 2018



이 책은 “민주주의 이론과 여성주의 정치 이론에 큰 기여를 해온” 여성주의 정치학자 캐롤 페이트먼이 1975년과 1988년 사이에 쓴 논문들을 엮어서 출판한 책이다. 저자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여성을 정치적으로 배제하여 남성에 종속적인 개체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페이트먼은 여기서 대표적인 사회계약론자 루소를 정조준하며, 그의 이론을 비판한다. 따라서 이 책에 담긴 논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먼저 읽는 것이 필수겠다. 그 외에도 존 스튜어트 밀이나 울스턴크래프트 긑안 초기 여성주의 이론가도 먼저 읽어야 하겠다. 






주지하듯이 서구의 근대 국민국가는 30년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그 토대를 쌓았다. 이러한 국민국가에 대한 정당화들은 개인의 소유권을 출발점으로 삼는 자유주의 국가론이며, 이는 홉스, 로크, 루소,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러 완결된다. 이들은 자연상태에서 국가로, 또는 가족과 시민사회에서 국가로의 이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국가를 궁극적 실체로 승인한다. 이 국가는 모든 폭력적 수단을 합법적으로 독점할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근거로(애국심) 국민들을 동원한다. 


그렇다면 이때 개인은 어떠한 수단으로써 국민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피의 증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민은 국가가 국가를 위해 죽으라고 할 때 죽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국가의 보호 속에서 그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그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계약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보호와 권리의 대가로 국가가 필요할 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국민이 될 수 있다. 이는 국가의 생사여탈권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한, 그는 국민일 수 없으며, 권리와 의무의 대상에서 제외됨을 의미한다. 국민은 언제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 바로 사형대에 오르거나 병사가 되어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할 때이다. 


이 지점에서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여성이 배제되는 지점이 발생한다. 여성은 병사가 될 수 없다. 혹은 병사가 될 수 없는 한 여성은 국가의 외부적 존재이며, 그러므로 남성과 달리 법적 인격을 부여받을 수 없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자들은 남자들의 궁극적 의무를 공유하지 않는다.” 


페이트먼에 따르면, “원초적 합의를 통한 시민사회의 창조 이야기에서 여자들은 시민사회의 한 부분이면서도 자유와 평등, 권리, 계약, 이익, 시민권의 공적 세계로부터 분리된 사적 영역의 거주자로서 새로운 사회적 질서 안으로 통합된다.” 단 한 명의 예외인 홉스를 제외한 사회계약론자(특히, 루소)는 오로지 남성만을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로 보았다. 여성은 이론상으로 모든 공적 영역, 곧 정치적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근거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에서 기인한다. 즉, 여성은 병사가 될 수 없기에 법적 인격을 부여받지 못한 채 가정 등의 사적 영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반대로 남성의 신체는 그 자체로 병사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그는 정치에 참여하여 공적 영역을 점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성=공적 영역’ <-> ‘여성=사적 영역’의 도식이 만들어지고, 승인된다. 


선천적으로 생사여탈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여성은 “시민적 삶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역량들을 결여하거나 개발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러한 여성은 그들의 본성 때문에 “국가 안에서의 무질서의 원천”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이러한 의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성도 국가 내부의 존재, 즉 국민으로 취급된다. 이는 어떠한 메커니즘을 거친 것일까? 바로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에서가 아니라 남자들의 피부양자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자들은 항상 남성의 “종속자나 덜떨어진 남자로서 시민 질서에 병합”되었고, 병사가 될 수 없는 여성의 신체는 구조적으로 국민의 대상 바깥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녀는 남성을 매개로 해서만 국민이 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여성이 국민인 한, 그녀는 남성을 매개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공고히 유지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이영재, 『제국 일본의 조선영화』, 현실문화, 2008


 

우리는 남성의 신체 가능성이 어떻게 국민의 가능성으로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여성이 어떻게 배제되는지를 프로파간다 영화 ‘지원병’(1941)과 ‘조선해협’(1943)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영화사 연구자 이영재의 <제국 일본의 조선영화>와 ‘황군의 사랑, 왜 병사가 아니라 그녀가 죽는가’(이 논문은 riss에서 무료로 구할 수 있다)를 참고하겠다. 


1938년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조선육군 특별지원병령’과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이 공포되었다. 이는 피식민지인의 참정권을 요구해왔던 피식민지 엘리트층을 고무시켰다. 왜냐하면 앞서 봤듯이, 병사의 의무는 곧바로 국민의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원병 제도는 의무교육제 및 참정권 문제와 함께 거론되었다. 병사가 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의무이자 권리로서, “제국의 피식민자를 ‘국민’으로 재탄생”시킨다. 영화 <지원병>은 이 ‘조선육군 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고 제작된 첫 번째 지원병 프로파간다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병참기지화와 총동원을 둘러싼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경합과 협력 그리고 미묘한 결렬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잠시 이 영화를 살펴보자. 


(참고로, 유투브에서 두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다만 <조선해협>은 모든 대사가 일본어로만 되어있다.) 


주인공 춘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골에서 마름 일을 하고 있는데, 그의 마름 자릴 호심탐탐 노리는 마을의 모략꾼 김 첨지는 새로운 지주를 꼬드겨 춘호를 몰아내려 한다. 춘호에게는 분옥(문예봉 연기)이라는 약혼녀가 있는데, 춘호의 친구 창식이 분옥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둘 사이를 오해한다. 그는 어느 날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 지원병에 자원한다. 이로써 그의 모든 갈등은 어느새 말끔히 해결된다. 당혹스러운 줄거리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시종일관 찡그리고 있는 춘호의 우울이다. 그는 영화 첫 장면부터 늘 단조로운 표정 연기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김 첨지나 분옥과의 애정 갈등이 일어나기 전부터이다. 다시 말해 그의 우울은 제3의 요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고, 이 제3의 요인은 바로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병사가 된 순간 그가 처음으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병사는 조선이 식민지가 됨으로써 잃어버린 국민의 가능성을 되찾게 해주는 계기였다. 


또한, 지원병은 그에게 “가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지원병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뒤 춘호는 분옥을 찾아가 말한다. “나는 제국군인이 될 테요!” 그런데, 두 사람의 오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해소되고, 사랑은 회복된다. ‘병사’의 선언은 그의 연애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이다. 춘호의 신변이 변하면서 둘의 사랑이 회복된 것이다. 이는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던 최대의 장애야말로 춘호 자신”이었음을 보여준다. 다소 비약이지만, 병사가 되기 전에 춘호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거세된 남자”, 즉 탈남성화된 신체였다. 지원병은 그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는 계기였다. 병사, 다시 말해 국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탈남성화된 피식민지인 남성”을 “재남성화(remasculinization)”한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영화는, 춘호가 병사가 되면서 모든 갈등이 해결된다는 개연성따위 포기한 줄거리를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다. 춘호가 지원병 군용열차에 올라타고 떠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때 분옥이 떠나는 춘호를 보면서 어딘가 흐린 미소를 짓는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인파가 군용열차를 떠나보내면서 시작하는데, 이 무리에 춘호도 있다. 즉, 이미지의 중첩으로 볼 때, 분옥은 ‘병사가 된’ 춘호를 대신한다. 즉, 춘호의 우울은 이제 분옥에게 전이된 것이다. 그러나 분옥(=여성)은 병사가 될 수 없다. 그러면 그녀의 우울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조선해협>은 <지원병>의 마지막 장면을 확장하고 변주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영화이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여성의 국민화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여성은 남성을 기다림으로써만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줄거리를 간략히 옮기겠다. 


금숙(문예봉 연기)과 성기는 사랑하는 사이지만, 성기 집안의 반대로 부부로 인정받지 못한다. 결혼을 인정받기 위한다는 사적 문제 때문에 성기는 금숙에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훈련소에 입소하고, 금숙은 그런 성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홀로 아이를 키우고 방직공장에서 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금숙은 과로에 지쳐서 공장에서 쓰러지고 성기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는다. 일본으로 후송된 성기는 입원한 금숙에게 전화를 걸고(이때 둘은 처음으로 만난다), 금숙은 사망한다(원본 필름에는 금숙이 죽는 결말이나, 현존하는 필름에서는 금숙은 산다). 성기의 아버지는 드디어 금숙과 아이를 받아들인다. 


이 영화는 잔혹할 정도로 금숙을 기다리는 존재로 만든다. 성기는 금숙과 사랑하는 사이면서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군인이 된다. 성기의 여동생은 금숙을 헌신적으로 도와주면서도 성기의 입소 사실은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둘은 늘 엇갈린다. 어쩌다 만날 뻔한 상황조차 만나지 못한다. 전화 한 번 빼고는 둘은 만난 적이 없다(과거 회상 제외). 금숙과 성기 사이에는 커다란 벽 같은 것이 놓여져 있다. 이는 제목의 <조선해협>에서도 볼 수 있다. 성기는 병사가 되어 식민지 본국, 일본에 있지만, 금숙은 조선에 있다. 거기에는 해협이라는 건널 수 없는 애정의 장애물이 있다. 이 모든 영화의 내러티브와 상징은 단 하나의 목적을 드러낸다. 곧 금숙의 기다림이다. 


<조선해협>은 여성의 국민 가능성을 ‘기다림’에서 찾는다. 즉, 여성은 징병제를 통해 군인으로 나간 남성을 ‘기다리는’ 역할을 통해서만 국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병사가 된 남성은 국민이 됨과 동시에 여성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여성은 병사가 된 남성을 기다려야만 한다. 흔히 말해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것은, 남성을 배신했다는 사적인 요인에서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격까지 훼손하여 공적으로도 지탄받아야 하는 행위이다. 이렇게 보면,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안 된다는 말, 꽤 무서운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잔인하다. 이 잔인함은 두 가지 요인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금숙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그녀의 기다림을 강조하는 가학적인 서사의 잔인함이며, 다른 하나는 국민국가 자체에 내재해 있는, 남성을 매개로 해서만 여성의 국민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체제의 잔인함이다. 이로써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근대 국민국가는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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