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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시연 Jul 15. 2024

네덜란드, 헤이그, 그리고 1907년


 2024년 7월, 네덜란드 델프트(Delft)의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 학회의 마지막 날 정신없이 학회 발표들을 듣다 보니 오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맑은 날씨를 지나칠 수 없어 남은 오후 학회 일정을 뒤로하고 헤이그(den Haag)로 향했다.

 

 헤이그는 델프트에서 기차로 15분 정도 타고 가면 금방 도착한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수도느 암스테르담이지만 헤이그에 네덜란드의 모든 행정 정부 부서, 대법원 그리고 각국 공관이 주재해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실질적 행정 수도로 여겨진다. 또한 헤이그에는 현재까지 국제사법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 등 국제적 평화와 안전 유지를 목표로 하는 국제기구들이 있는데 이의 배경에는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였던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빼놓을 수 없다. 헤이그에서 이 회담이 열렸을 때 이준, 이위종, 이상설 3인으로 구성된 헤이그 특사가 보내서 을사늑약의 강압과 부조리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헤이그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곳이다. 이것이 내가 헤이그에 간 목적이었다. 이준 열사가 순국하신 호텔을 인수하여 설립된 이준열사 기념관에 방문했다. 그곳에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잊고 있던 우리의 슬픈 역사를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 고종 황제에 의해 특사로 임명된 3명의 열사들이 헤이그에 도달하기까지 거쳐간 여정은 한 편의 영화와 같았다. 이준 열사는 서울에서 부산,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다음 그곳에서 합류한 이상설 열사와 함께 약 1달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러시아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던 젊은 이위종 열사의 도움으로 공고사를 러시아로 번역하여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의장국인 러시아에 제출했으나 어떠한 답도 듣지 못했다. 결국 특사들은 베를린을 거쳐 헤이그에 도착하였고, 대한민국이 처한 부당한 상황을 알리려고 힘써 싸웠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이준 열사는 헤이크에 도착한 해 7월, 지병이었던 뺨종기가 악화되면서 순국하셨다.










 이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 독일, 스위스, 러시아 등 먼 유럽 대륙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대한민국 민족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치열한 항쟁들이 있었다. 악조건에서도 꿋꿋하게 지조를 지켜 싸워오신 우리나라의 모든 선조들께 감사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벅차고, 슬프고, 아팠다. 그렇게 견디고 싸워오신 독립운동가들 덕분에 1996년 대한민국 국민으로 내가 태어날 수 있었고, 동쪽 아시아 대륙 끄트머리 붙어 있는 한반도 작은 땅에 존재했던 모든 국민들의 땀과 노력이 쌓여 2024년 현재 먼 땅 유럽에서 이제는 세계인들이 관심 갖는 대한민국의 유학생으로 잘 생활할 수 있었다. 삶의 의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거창한 꿈과 목표를 향해 살지 않더라도, 이 삶 자체에 감사하며 조용히 행복하게 살다가 떠나더라도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모습조차 흐뭇해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준열사 기념관을 나와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장소였던 비넨호프를 거쳐 평화궁으로 갔다. 평화궁은 만국평화회의 회담의 결과 1913년 헤이그에 설립되었다. 평화궁에는 국제 사법 재판소, 상설 중재 재판소,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 및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평화궁을 보면서 나는 대학시절 읽었던 정재민 판사의 소설『독도 인 더 헤이그』를 떠올렸다. 『독도 인 더 헤이그』는 독도영유권을 두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국제적 법정 공방전을 역사 추리 소설이다. 물론 픽션이기는 하나 독도를 둘러싼 국제 소송이 발생했을 경우 실질적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실효적 지배 주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헤이그의 방문은 중요한 교훈을 머릿속에 남겼다. 역사는 얽혀있는 국제 정세와 상황 속에서 현재 우리가 어떻게 현명하게 나아갈 수 있을지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제7광구, 아마 독도영유권에 대한 한일 간 영역 논쟁에 반해 7광구에 대한 공방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이 7광구에 대한 개발권과 관련해 조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에 기술력과 자본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과의 공동개발 협정으로 전략을 변경하여 1974년 제7광구를 50년간 한일 공동 개발 구역으로 하는 협정을 체결하였고 1948년부터 이 협약이 발효되었다. 그러나 1982년 UN에서 해양법에 관한 새로운 협약이 채택되면서 문제가 대두되었다. 국제법 상 해양경계획정 기준에 대륙붕 자연연장론에서 중간선 원칙으로 변경되고 연안의 200 해리까지의 모든 자원의 경제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배타적 경제 수역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일본이 조용히 시간 끌어 조약 기한이 만료되면 7광구 영역의 90 %가 일본의 권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7광구에 대한 한일 공동 개발 조약은 약 1년 남짓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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