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시대에 '델포이(현지어로는 델피) 신탁'이라는 게 있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신전에 있는 무녀(Pythia)를 통해 신의 뜻을 묻고 지침을 받았던 것을 말한다. 당시 최강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도 전쟁을 하거나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델피에서 신탁을 받는 '형식적 절차'를 거쳤다. 사실은 인간의 정치적인 결정이었지만 이를 '신의 뜻'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델피 유적지 입구에는 당시의 보물창고 건물이 있었다. 신탁을 해줘서 고맙다는 성의 표시를 했을 수도 있고 신탁을 구하는 측의 입맛에 맞게 신탁을 해달라는 뇌물의 의미일 수도 있다(난 후자에 한 표).
델피는 아테네에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와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니 옛날 우매한 백성들이 신을 찾을만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피 바로 뒤에는 해발 2,200m의 파르나소스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으며 좌우와 전방에도 암벽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정남향의 지세였다. 무속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이곳에 오는 순간 왠지 신이 존재할 것만 같았다. 2,500년 전엔 말할 것도 없었겠지. 당시에는 땅에서 가스까지 나와서 무녀들이 이 가스를 마시고 몽롱한 상태에서 접신했다고 한다. 신탁의 신빙성 여부와 별개로 지형 자체만으로도 가히 '영빨'이 충만한 곳이라 하겠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신이 세계의 중심을 알아보기 위해 독수리 두 마리를 동쪽과 서쪽으로 보냈는데 둘이 만난 곳이 델피라고 한다. 그래서 제우스신이 델피에 돌 하나를 놓아 세계의 중심(일명 세계의 배꼽)으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옴팔로스(그리스어로 배꼽이란 뜻)라는 돌이 있다. 진품은 박물관에 있고 마당에 있는 건 모조품이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생각난다. 예전 90년대에 '옴파로스'라는 의류 브랜드가 있었다. 가사가 '바람이고 싶어. 강물이고 싶어. 그대 기억 속에 그리움으로 남고 싶어. 옴파로스~' 였던가. 그게 델피 옴팔로스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기둥 몇 개만 남은 아폴론 신전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니 연극 공연장이 나왔다. 당시엔 그리스 어디서나 공연을 즐기는 게 문화였나 보다. 아테네에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도 여기 델피에도 대규모 원형극장이 있다. 마땅한 취미생활도 달리 없었을테니 저녁 먹고 다들 공연장으로 모여서 노래하고 연극보고 그랬겠지. 극장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니 운동장이 하나 나왔다. 여기는 기원전 6세기 범그리스 체육대회가 열려 4년마다 각지에서 온 선수들이 실력을 겨룬 장소라고 한다. 맘 같아선 옛날 그리스 전사처럼 달리기라도 해보고 싶었으나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놨다. 아까비..
아테네 아고라에선 헤파이스토스 신전에서 아크로폴리스를 올려다 보는 경관이 최고였다면, 델피에선 여기가 포토 포인트였다. 아래로 파르나소스산의 절벽과 계곡이 아폴론 신전터의 6개 기둥과 조화를 이루어 또 하나의 멋진 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장 사진이 잘 나오는 자리를 놓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정도였으니.
이전 포스팅(그리스에서 살아봤습니다-11)에서도 언급했듯이 델피 아폴론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수준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델피 아폴론 신전-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애기나섬 아페아 신전을 잇는 세 개의 선분이 각각 122km-122km-29km로 정확히 이등변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또 델피 아폴론 신전-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잇는 삼각형도 각각 122km-122km-188km로 또한 이등변삼각형이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세상의 중심이자 폴리스 지도자들이 돈을 싸짊어 지고 와서 '영빨'을 갈구했던 델피에서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니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아폴론 신전 기둥 옆을 지나치며 나도 작은 소원 하나 빌고 올 걸.
p.s.) 델피에서 약 10분 거리에는 아라호바라는 마을이 있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일명 '송-송 커플'이 키스를 했던 시계탑이 있는 예쁜 동네다. 아라호바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