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Pooenheimer:1904-1967)의 평전이다. 평전은 전업작가가 한 인물이 남긴 일생의 흔적을 찾아서 기록한다. 남긴 흔적은 생존시 다뤘던 신문기사, 인터뷰, 공식적인 기록, 같이 일하거나 사귄 인물들이 가진 편지 그리고 그들과의 인터뷰 등을 말한다. 한국의 자서전은 본인이 쓰기도 하지만 대개 작가가 써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거의 정치적이고 꾸밈이 많아서 읽을 거리가 빈약하다.
외국 자서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버트런트 러셀의 자서전(autography)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번역판 <인생은 뜨겁게>가 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사후 작가들이 고증을 통해서 펴낸 평전이므로 기록에 의존하기에 감정이입하기 어렵다.
총 40장으로 구성된 이 오펜하이머 평전 한국어 판은 890페이지에 이른다. 카이 버드(Kai Bird)와 마틴 셔위(Martin J. Sherwin) 두 작가는 오펜하이머의 삶을 따라 시대와 사건을 세심하게 기록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졌고 그의 사업성공에 따라 부유하게 자랐으며 그림을 모으는 어머니의 문화적 취향까지 그려낸다.
유럽으로 건너가 처음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었으나 이곳에서의 실험물리학에 어려움을 겪었고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양자물리학의 이론가로 성장하는데 직접적 영향을 준 곳은 이론 물리학의 본산인 독일의 쾨팅겐 대학이었다(101쪽). 1920년대 초는 닐스보어와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1901-1976) 등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물리학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책을 즐겨 읽었고 음악, 미술,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도 보였다. 오펜하이머가 노벨상을 타지 못한 것은 그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전략과 타이밍 등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보면 성과를 중시하는 노벨상에는 적합치 않았다(153쪽).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은 물리학계 전반의 성과들을 통합하는 능력에 있었다. 1934년 무렵까지 그는 시사나 정치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게 되고 유태계 독일인 교수들이 쫒겨나는 사태를 보고 그의 태도는 달라지게 된다. 이것이 그가 원폭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이유다.
영화 오펜하이머도 소설과 전체적인 줄거리는 다르지 않다. 유복한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자유분방한 삶을 누리던 오펜하이머가 황무지와 다름 없던 지역 로스앨러모스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나지만 개성이 강한 여러 유명한 물리학자, 수학자, 공학자들을 진두지휘하며 핵개발에 성공한 시기가 그의 전성기였다.
그의 삶에 주목한 것은 과학의 천재성과 영웅적인 면모 뒤의 한 인간의 삶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맨해튼 프로잭트가 성공한 후에는 그는 그의 손에 피가 묻어나는 것을 괴로워한다.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정적을 제거하는 메카시 광풍이 오펜하이머를 덮친다. 이 기획의 선두에는 집요한 스트라우스가 있었다. 과학의 천재들도 피해가지 못하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와 정치적 흥망이 새삼스럽다.
머리를 깍고 산에 들어간다해도 인간의 원초적 문제들인 여자, 돈, 정치적 분쟁은 해결되지 않는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인간들이 숨을 쉬는 사회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문제가 작동한다. 오펜하이머은 부유하고 재능도 있어서 삶이 순탄할 것 같다. 그런데도 그의 연애사와 가족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키티에 대해 페이스는 "그녀의 음주 문제와는 별개로, 키디는 지금까지 내가 본 여자 중에 가장 비열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잔인한 여자였다."라고 썼다(618). 더구나 시대의 흐름인 정치적인 역경은 순수한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성공한 삶이 오히려 그의 족쇠가 되는 인간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다.
고등 연구소의 가장 유명한 멤버였던 아인슈타인은 "다양한 교육을 받은 비상하게 유능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존경했던 것은 그의 물리학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오펜하이머였다. 1930년대에 오펜하이머는 고집스럽게 양자 이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아인슈타인을 두고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575).
"오펜하이머과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로서 의견을 달리했지만, 휴머니스트로서는 한편이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군사 연구소와 대학의 미국 과학자들은 점점 군사 관련 연구 계약에 의존하게 되었지만, 오펜하이머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과학이 군사화하는 "현장에 가까이" 있었지만,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를 과감하게 떠났고, 아인슈타인은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군비 경쟁에 제동을 걸려 한 것에 경외감을 표했다. 동시에 그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영향력을 과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577쪽>
오펜하이머는 매카시 반공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희생자였다. 역사가 바튼 번스타인(Barton Bernstein)은 "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매카시 없는 매카시즘의 승리였다,"고 썼다. 스트라우스는 마음 맞는 몇몇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오펜하이머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미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거대한 것이었다. 겉보기에는 단 한명의 과학자가 파문당한 사건에 불과했지만, 모든 과학자들은 앞으로 국가 정책에 도전하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리라는 점을 알아채게 되었다(828).
영화 후반부는 스트라우스가 그레이 위원회를 이용해 오피를 '위험한 좌파 지식인'으로 몰고 가는 과정을 지리할 정도로 길게 보여준다. 이는 한 시대가 낳은 위대한 지식인이 특정한 증거 없이 정치적 공격과 사상 몰이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로 보인다.
한국은 이보다 훨씬 심하고 노골적일 것이다. 특별한 이유나 설명없이 과학 예산을 삭감하는 정책을 보면 불문가지이다. 산에 있다고 학교에 있다고 정치의 영향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를 보며 정치는 정치인이란 특정한 사람만이 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물과 공기와 같은 환경요소임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청문회는 종교재판처럼 진행되었고 "원자 과학계를 대표하는 과학자"이며 "훈장을 주렁주렁 단 웬만한 장군보다 안보에 공을 세운 과학자"인 그의 명예를 파괴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의 경우에 비교되고 유럽의 갈릴레오가 종교 박해를 받았던 피해 과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는 1967년 2월 18일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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