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현대 전쟁 발상지에서 첨단 방위산업 요람까지

by 김장렬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돌로 쌓은 성벽과 해자, 오래된 대포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그것을 멋진 관광지로만 바라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전쟁의 흔적이고 방위산업의 자취다. 무기를 만드는 일, 즉 방위산업은 이 대륙에서 가장 먼저 체계화되었다.

유럽 요새.png 유럽의 요새, 방위산업의 자취

방위산업이라는 말은 다소 딱딱하게 들린다. 그러나 본질은 단순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기와 군사 장비를 만드는 일이다. 중세 기사들의 칼과 방패는 장인의 손끝에서 나왔지만, 14세기 이후 화약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총과 대포를 만들려면 쇳물을 녹이고, 똑같은 규격으로 부품을 찍어내야 했다. 이는 더 이상 동네 대장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국가는 직접 제작소를 세우고, 수많은 장인을 조직적으로 모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전쟁 준비는 산업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8세기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방위산업의 성격은 다시 바뀌었다. 증기기관과 철강, 대량생산기술은 무기를 공장에서 쏟아내게 했다. 영국의 조선소에서는 증기선 전함이 만들어져 바다를 지배했다. 독일은 화학 기술로 폭약과 탄약을 대량 생산하며 포병 강국이 되었고, 프랑스는 강철 대포와 최신식 요새로 국경을 지켰다. 이 무기들은 유럽에 머물지 않았다. 식민지를 넓히려는 발걸음과 함께 총과 대포도 세계로 나갔다. 총과 깃발이 함께 움직였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HMS Warrior (1860).png HMS Warrior , 1859~1861년 영국 해군을 위해 건조된 40문의 증기 추진 장갑 호위함

20세기 초, 유럽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의 공장들은 모두 총탄과 포탄, 전차를 쏟아냈다. 영국은 거대한 전함을 건조했고, 프랑스는 르노 FT라는 새로운 개념의 전차를 세상에 내놓았다. 독일은 대포와 화학무기로 전장을 흔들었다. 전쟁은 방위산업을 국민 전체의 산업으로 만들었다. 한 나라의 경제와 노동이 모두 전쟁에 동원되었다.

르노FT 전차.png 제1차 세계대전 1918년 5월 프랑스 쥐비니(Juvigny) 인근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는 르노 FT-17 전차

제2차 세계대전은 방위산업을 과학기술의 시험대로 끌어올렸다. 독일의 전격전은 전차, 항공기, 무전기가 결합된 새로운 전쟁 방식이었다. 소련은 전차 생산 능력으로 반격했고, 영국은 레이더와 암호 해독으로 하늘과 바다를 지켰다. 이때 방위산업은 단순히 무기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국가의 과학과 기술을 총동원하는 생존의 시험장이었으며 현대 전쟁에 맞는 방위산업이 태동했다.

영국 레이더.png Chain Home, 제2차 세계대전 항공기를 탐지하고 추적하기 위해 영국 공군이 건설한 해안 조기 경보 레이더

전쟁이 끝난 뒤 유럽은 다시 나뉘었다. 서쪽은 미국과 손잡고 NATO를 만들었고, 동쪽은 소련을 따라 바르샤바 조약군에 들어갔다. 서유럽은 미국의 원조로 군수산업을 재건했지만 곧 독자 노선을 모색했다. 드골 대통령은 “미국만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프랑스의 독자 핵무기를 추진했다. 영국은 핵잠수함과 전략폭격기를 확보했다. 독일은 전후 제약 속에서도 레오파르트 전차로 이름을 알렸다.

드골 핵실험 참관.png 1966년 프랑스,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산호섬에서 수소폭탄 실험 감행, 드골 대통령이 순양함 ‘드 그라스’에서 지켜보고 있다.

동유럽은 소련제 무기를 생산하는 하청 기지가 되었다. 체코는 항공기를, 폴란드는 전차를, 동독은 소화기를 만들었다. 설계는 모두 소련의 것이었다. 냉전 속 유럽의 방위산업은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었다. 이념과 체제의 경쟁이었다.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나자 유럽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군비는 줄었고 사람들은 평화를 믿었다. 하지만 군수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합병과 재편을 거듭했다. 이때부터 유럽식 해법, 즉 공동개발이 등장했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이 함께 만든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 에어버스가 주도한 A400M 수송기,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기업이 합쳐 만든 MBDA 미사일 회사가 그것이다. 단일 국가로는 미국과 맞설 수 없다는 현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협력 속에서도 주도권을 두고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유로파이트.png Eurofighter Typhoon :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의 컨소시엄이 공동 개발한 쌍발엔진의 다목적 전투기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유럽은 충격에 빠졌다. 전쟁은 역사 속 이야기라고 믿던 사람들은 눈앞에서 폭격을 보았다. 독일은 ‘자이트벤데(Zeitenwende)’, 즉 시대의 전환을 선언하며 대규모 군비 증강을 발표했다. 폴란드는 한국산 전차와 자주포, 미국산 다연장 로켓을 대량 도입하며 동유럽의 새로운 군사 강국으로 변했다. 포탄 공장은 밤낮없이 가동되었고, 방공 체계와 드론 생산이 늘어났다. 그러나 첨단 무기와 정보 체계에서 여전히 미국 의존이 크다는 점도 드러났다. 유럽은 자율성과 동맹 의존 사이에서 갈림길에 서 있다.

폴란드와 한국무기.png 한국산 무기 도입 후 군사 강국으로 변한 폴란드

2024년 3월에 유럽엽합(EU)가 발표한 유럽 방위산업 전략에서는 유럽산 무기 비중을 20% → 50%로 확대하고 역외 무기의존도 축소, 2030년까지 EU 내에서의 방산 거래 규모를 15% → 35% 확대하는 것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신규 구매하는 군사장비의 40% 이상은 공동구매로 구입하고, 유럽 내 방산 스타트업 및 중소기업 금융 지원을 위한 신규 기금 조성하면서 방산업체의 신규 투자 시 자금 조달이 용이하도록 유럽투자은행(EIB)의 대출 요건 변경하였다. 러-우 전쟁의 여파로 우크라이나 방산업계와의 협력을 확대하며 동시에 러시아 동결자산 수익을 우크라이나 방산 지원에 활용 고려하면서 유럽 방위산업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방위산업 전략.png EU, 유럽 방위산업 전략

유럽 방위산업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주요 기업들을 봐야 한다. 영국의 BAE 시스템즈는 전투기, 잠수함, 군함, 전자장비를 모두 만드는 거대한 기업이다. 유럽 연합체인 에어버스는 민간 항공으로 유명하지만 군사용 부문도 강력하다. 프랑스의 다소 항공은 라파엘 전투기로 자존심을 지켰다. 독일의 라인메탈은 전차와 자주포, 포탄의 강자다. 스웨덴의 사브는 그리펜 전투기와 아처 자주포, 잠수함 기술로 작은 나라의 힘을 보여준다. 이 기업들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한다. 그것이 유럽의 방위산업 생태계다.

유럽 산업.png 유럽 방위산업 주요 기업의 주력 무기

유럽의 방위산업은 이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차세대 전투기 경쟁이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이 주도하는 FCAS 프로젝트와 영국, 이탈리아, 스웨덴이 추진하는 템페스트 프로젝트가 있다. 두 프로젝트는 모두 미국의 F-35에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6세대 전투기를 만들려는 시도다.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전장 영역이다. 사이버전은 총알보다 해킹이 무서울 수 있는 시대를 열고 있다. 우주 방위는 위성을 지키고, 극초음속 무기는 방공망을 무력화한다. 유럽의 무기는 자국 방어에만 쓰이지 않는다.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가 주요 수출 시장이다. 라파엘 전투기, 그리펜, 레오파르트 전차는 이미 세계적 브랜드가 되었다. 앞으로도 수출은 방위산업을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미래 무기 체계.png 유럽 방위산업의 미래 지향 방향

유럽은 오랫동안 전쟁의 발상지였고 동시에 방위산업의 시험장이었다. 수많은 기술이 이 땅에서 태어나 전장을 바꾸었다. 그러나 유럽은 협력과 통합으로 또 다른 길을 찾으려 하고 있다. 과거에는 서로를 겨눴지만, 이제는 함께 무기를 개발하며 미래를 준비한다. 그렇다고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자주국방과 미국 의존, 무기 수출과 윤리적 책임, 기술 발전과 군비 경쟁 사이에서 딜레마는 여전히 남아 있다.


유럽 방위산업을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무기의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 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묻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 스웨덴과 러시아, 폴란드와 터키, 스페인과 우크라이나 등 주요 나라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그들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따라가며, 방위산업이라는 이름 아래 담긴 문명의 긴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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