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빨갱이'라는 단어를 처음 아빠한테서 들었다.
할머니가 밭에서 가져온 곡물과 채소를 마루나 땅 밑에다 숨겨두면 빨갱이(빨치산)들이 기똥차게 냄새를 맡고 기어코 찾아냈단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보이는 대로 죄다 가져가지만 들이대는 총부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날은 아빠가 배가 고파서 배를 움켜쥐고 있으니까 빨갱이가 구둣발로 아빠배를 짓밟았다고 했다. 아빠는 빨갱이의 빨 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아빠가 사는 정읍시에는 내장산 국립공원의 일부인 칠보산이 있는데 빨갱이들이 그곳에 터를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들이닥치는 빨갱이 때문에 곤혹스러운 데다가 낮에는 빨갱이를 잡겠다고 두 눈에 불을 뿜은 진압군들이 쳐들어와 탄압을 시작했다. 어느 날 진압군들은 모든 마을 사람들을 북면국민학교로 모이게 했다. 세 살배기 아빠는 누나 손을 잡고 국민학교로 향한다.
"이 중에 빨갱이한테 협조한 사람들 다 나와."
호랑이처럼 으르렁 거리는 진압군의 말에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질 못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고자질을 한다.
"OOO, OOO아버지, OO네 아들,..."
이름이 불려진 사람들은 앞으로 끌려가 일렬로 줄을 섰다.
"탕. 탕. 탕. 탕."
어린 아빠 눈에서 사람들이 고꾸라졌다. 아빠는 이 것을 인민재판라고 불렀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이 공권력으로 국민을 처형시키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이들은 가마에서 옥수수를 삶아 건네준 사람, 쌀가마를 어깨에 메고 날라주던 사람, 돼지를 데리고 산까지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나는 여순사건을 아빠 때문에 알게 되었다. 1948년, 제주에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자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그해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14 연대가 제주 4.3 항쟁 진압 명령에 불복하면서 여순 사건을 불러왔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남녀아동이라도 일제히 조사해 불순분자는 모두 제거'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이른바 중산간 지역 초토화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진압군(토벌대)이 한 지역을 점령하면 그동안 반란군 측에 가담했던 부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주민들을 공터나 학교로 소집했다. 불응하거나 이탈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빨갱이로 처형당했다.
한 하늘아래 낮에는 토벌대가 밤에는 반군이 어린아이부터 늙은 노인까지 죄 없는 사람들만 밤낮 죽어나갔다. 한국전쟁 후에도 빨갱이 소탕작전은 계속되었다. 할아버지는 붉은 해가 떨어질 때면 아랫목 농 밑에 구멍을 파고 거기서 밤을 지새웠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죽지 않았다고 아빠가 말했다. 안쓰럽게도 토벌군이 떠나간 해에는 마을마다 피 터지는 복수전이 펼쳐졌다.
"니가 내 아버지를 고발했어!"
"너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
농사를 지으려고 막아놓은 연못엔 사람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죽지 못해서 산다는 어른들의 말이 이래서 나왔나 보다.
"근데 이 걸 왜 물어봐?"
한숨을 내쉬다 말고 아빠가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아빠가 살았으니까 나도 살았잖아."
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에 연결되었던 아빠와 나 사이의 끈이 낡고 닳아서 다시 수선하고 수리되는 시간이라고. 그렇게 다듬어진 우리의 끈이 조금씩 선명해지면 한국 영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오래오래 이어질 것 같았다. 오늘도 창문 밖으로 붉은 해가 떨어졌다. 누가 쳐들어 오거나 총부리를 대거나 숨죽여 울지 않는 고요한 밤, 어린 아빠가 간절히 바라던 기적 같은 밤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