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정읍 중학교에 덜컥 붙어버렸다. 아무나 합격할 수 없다는 곳으로 소문난지라 아빠는 무지 기뻤다. 하지만 이내 중학교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아빠는 알고 있었다. 농사지으며 아홉 식구를 먹여 살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형도 가지 못한 중학교를 보내달라는 건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찰나 큰 집의 큰 형이 중학교쯤은 가족 중 한 명이라도 가야 되지 않겠냐며 수업비와 책값, 교복까지 다 사주었다. 집에서 정읍 중학교까지는 무려 7킬로미터. 하루에 네 시간 정도는 족히 걸어야 한다. 열세 살 아이가 걷기엔 까마득하게 먼 길이었지만 학교를 갈 수 있다면냐 산에 가서 멧돼지를 잡아오라 해도 소매를 걷어올렸을 아빠였다.
이른 아침 해가 처마 밑에 떠 있으면 도시락을 챙겨서 학교로 향했다. 집에서 가까운 개울을 지나 큰 산을 넘으면 정읍시 시장이 나왔다. 거기서 돌길 따라 또 한참을 걷다 보면 정읍중학교가 나온다. 걸으면서 영어단어를 외우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도시락 절반을 꺼내 먹고 또 걸었다. 아침 해가 마루 밑에 있는 *토방까지 내려와 앉은 날이면 큰일이다. 된통 늦어버렸다. 아빠는 줄행랑치듯 학교까지 뛰어가야 했다. 그에 반해 하굣길은 재미난다. 개울가 근처에 큰 묘지가 하나 있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른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한두 명씩 이곳으로 모여든다. 탱자나무에 열린 노란 탱자 열매를 따다 축구를 하고 달리기나 술래잡기도 했다. 날이 더운 날이면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쳤다. 교복 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거나 흙탕물로 얼룩이 지더라도 아빠 입에선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피리리. 피리리. 신나기도 하지.
다복했던 중학교 일 년이 훌쩍 지나고 아빠 입에서 더 이상 휘파람이 나오지 않던 때가 있었다.
"하지 마. 하지 마"
덩치 큰 아이들이 아빠를 놀리기 시작했다. 보통 학급에선 키가 작은 아이부터 큰 순서로 번호를 매기는데 아빠는 국민학교나 중학교나 한결같이 3번 아니면 4번이었다. 어느 날, 아빠 뒤에 앉은 철식이와 열식이가 연필심으로 아빠 머리를 쿡쿡 찔러댔다. 철식이는 15번, 열식이는 17번이었다. 아빠가 '하지 마'라고 얼굴을 찌푸리면 쉬는 시간마다 발길질을 하며 더 못살게 굴었다. 괴롭힘은 한 달이 넘어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빠는 이 일을 어떻게 넘길까 고민고민하다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드디어 태권도장에서 빨간 띠를 따던 그 해 겨울, 아빠가 철식이를 불렀다.
"너, 나랑 붙어!"
아빠 말에 따르면 그날, 철식이는 존나 얻어맞았다. 그다음 날은 열식이를 불렀다. 열식이도 마찬가지로 단단히 매운맛을 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겠지. 아빠의 두 어깨가 귓가까지 닿으려는데 철식이네 아버지가 아빠를 불렀다. 철식이네는 정읍시장 큰 거리에서 중앙약국을 하고 있었다.
"철식이하고 친하다며. 이 층에 방이 있으니 거기서 잠도 자고 철식이랑 잘 지내."
철식이 아버지가 말했다. 금쪽같은 아들을 패버렸으니 협박 같은 걸 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뜻밖의 말이었다. 아빠는 그날로 학교와 가까운 철식이네 집에서 자주 잤다. 철식이와 잘 지낼 뿐만 아니라 철식이에게 산수는 물론 태권도도 가르쳤다. 어느덧 삼 년이 지나고 아빠는 정읍중학교를 11회로 졸업했다. 그 후 고등학교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형편상 가지 못했던 게 무척 아쉬웠다고 한다.
아빠는 살아가면서 몇 번의 큰 고비들이 있었다. 한 건물을 샀다가 건물주가 사기치고 도망쳐 버린 일. 아주 가까운 친구한테 큰돈을 빌려 줬다가 적반하장으로 빌려준 적이 어딨냐며 면박당한 일. 있는 돈 다 끌어모아 개업한 식당이 잘 되질 않아 접어야 했던 일. 아빠가 이런 고비들을 억척스럽게 넘길 수 있었던 건 그 높은 산을 수백 번도 올랐을 열세 살 소년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 밖에서 아빠 몸으로 학습했던 것들 말이다. 지구력이나 탄력. 뚝심 또는 작심 같은 것. 어느 '력'이나 아무 '심'을 갖다 붙인다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빠의 인생학교는 최고였다고 말하고 싶다. 어느 유명한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했다 할지라도 배울 수 없었을 초능력 같은 것들 말이다.
*토방: 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 좀 높이 편평하게 다진 흙바닥(흙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