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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과 결혼하면 이런 일이..

by 제스혜영

그날 성난 번개는 하늘을 찢을 듯 울어댔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30분이면 닿을 그레이트 베리어섬(Great Barrier Island)을 가는 길이었다. 승객 사십 명을 태운 조그만 비행기가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했다. 어찌나 난폭하게 흔들리던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편은 날씨가 괜찮아지면 웅장한 절벽과 흰모래가 융단처럼 깔려있는 해변가에서 드넓은 태평양을 바라보며 나에게 청혼하려고 했단다. 남편의 부푼 바람과 달리 친구집에 머무는 삼일 내내 폭우가 내렸다. 낙원을 상상했던 이 섬에 해가 떴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둠이 눌러앉은 데다 번개가 찢어 논 하늘에선 작정한 듯 비가 쏟아져내렸다. 그래도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목표는 달성해야 되지 않겠는가. 친구의 차로 해변 근처까지 어째 어째 도착했다. 차문을 열였는데 차문이 훌렁 날아갈까 봐 가슴이 벌렁거렸다. 입고 있던 비옷은 내 머리카락과 함께 미친 듯이 날뛰었다. 결국 남편은 친구집 거실에서 나에게 청혼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 사랑스러운 딸을 저에게 주십시오."

며칠간 연습했던 한국어였지만 더듬더듬 읽어가는 남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남편은 바짝 긴장된 자세로 꼿꼿이 전화기만 바라봤다. 모든 오감이 곤두선 이 순간 전화기 밖으로 아빠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오케이. 오케이." 내 대답과도 같았던지라 남편은 찢어진 하늘 위로 솟구칠 듯 기뻐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빠는 내 남편이 썩 내키지 않았었다. 남편의 까만 피부색 때문이었다. 아빠가 태어나서 흑인을 만난 건 내 남편이 처음이었다. 남편의 부모님은 *윈드러시 때 자메이카에서 영국으로 이민 왔고 남편은 영국에서 태어났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결혼을 앞두고 아빠가 남편에게 하이킥을 날렸던 날. 아빠의 검은 구두 앞코가 남편 코에 닿을락 말락 했었다. 깜짝 놀란 남편이 한 발작 뒤로 움직였다.

"잘해."

그 짧은 두 마디엔 내 딸한테 잘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과 공갈이 꾹꾹 눌러있었다. 아빠는 평생 살면서 우리 네 딸을 보호했었다. 태권도에 격투기를 배우며 나와 동생에게 호신술도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 테이크다운을 한답시고 동생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다 동생 어깨를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이제는 어여쁘게 다 키운 딸들을 하나씩 보내야 할 차례가 왔다. 내가 세 번 째였고 딸 한 명을 또 잃을 걸 생각하니 아빠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것이다. 그것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니 오죽했을까.


결혼식 후 우리는 혼숙을 했다. 영국에서 온 식구들과 한국에서 온 식구들이 캠핑카와 봉고차를 빌려 여행을 떠났다.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들처럼 우리는 피부색 말고도 다른 점이 많았다. 한국 식구들은 여행 곳곳을 두 눈으로 죄다 보고 와야 성이찰 듯 빨리빨리 움직였고 영국 식구들은 한 곳을 가면 거기서 뽕을 제대로 뽑을 때까지 세월아 네월아 굼뜨게 움직였다. 그러다 두 가족이 마음에 딱 맞는 한 장소가 있었으니 바로 로토루아의 온천이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속에서 사르르 몸이 녹자 남아있던 조금의 경계심마저 스르르 녹아버리는 듯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서로 빙긋이 웃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타우랑가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한 방 딸린 집이었다. 누가 시작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숟가락 하나씩 들고 모두가 둥글게 앉아 노래를 불렀다. 다섯 살 어린 조카가 부른 반짝반짝 작은 별부터 아빠의 '저 푸른 초원 위에'까지 가사를 몰라도 '얼쑤' 'Uh-huh' 각자의 추임새를 따라 하며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어느 누구도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좋은 기운에 취했는지 모두의 얼굴이 봉숭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지막 송으로 남편의 누나가 'We Are the World'를 불렀다. 어쩜 이 찰나에 이런 선곡을 하다니. 아빠도 노래를 아는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후렴구에선 모두가 두 손을 들어 나뭇가지처럼 좌우로 흔들었다. 하나의 뿌리에서 굵직하게 뻗어 나온 나무처럼 '우리'가 된 기분이었다..


We are the world,

We are the children

We are the ones who make a brighter day


우리는 세상이에요

우리는 아이들이에요

우리는 밝은 날을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중간생략)

우리가 더 나은 날들을 만들 거예요

바로 당신과 제가


마지막 노래와 그룹 허그를 마친 그날 밤, 안방에선 남편의 부모님이 캠핑카에선 한국 가족이 거실에선 나머지 여덟 명이 다 같이 잤다. 어쩜 이런 세상에 이런 아이들을 보았나. 밝은 날을 만들어갈 사람들이 옆에 있다고 뭉클하게 알려주는 밤이었다. 남편이 한국에 갈 때면 아빠는 남편을 데려가기 바쁘다. 팔짱을 끼고 하릴없이 이리저리 가까운 슈퍼나 공원 또는 교회에도 '우리 사위 왔어요'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자랑하고 싶단다. 지금도 나와 남편의 부모끼리 가끔 영상통화를 한다. 내가 중간에 없어도 손짓, 발짓 몸의 언어가 점점 늘면서 그들만의 대화를 주고받는데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꺼억꺼억 숨 넘어가듯 웃는 걸 보면 해맑은 소년과 소녀 같다. 결혼한 지 벌써 19년이 지났다. 아빠의 하이킥은 그 후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내 딸을 위해 남편이 하이킥을 배워야 되지 않을까 고민이 되는 요즘이다.



*윈드러시: 세계 2차 대전 이후(1948-1970년) 영국의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옛 식민지 국가 시민들로부터 이민을 적극 독려했었다. 윈드러시라는 말은 그들을 태운 선박 이름에서 따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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