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

도비산을 걸으며

by 맑은샘

주말아침, 마당정리를 시작했다. 잔디를 깎고 화단 정리까지 하고 나니 벌써 열두 시, 가볍게 컵라면 한 개씩 나눠먹고 홀로 산책길에 나섰다. 뒷문을 열고 잠시 걸어가니 길가에 발그레한 살구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깨끗한 것으로 골라 반으로 쪼개니 잘 익어서 쫙 벌어진다. 입에 넣으니 달콤하고 약간의 신맛이 자꾸 끌리는 맛이다. 주머니에 몇 개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 낮이지만 약간 구름이 머물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주니 걷기 좋은 날씨다.


도비산 해넘이전망대 쪽으로 걸어서 내려간다. 바로 부석사 가는 길이다. 요즘 애정하는 코스다. 원래는 정상 쪽으로 다녔는데 더워지면서 동사로 이어지는 서해랑 길을 따라 숲 속을 걷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혼자서 걷는 길 임도가 넓게 나 있어 간간히 차량도 지나다닌다. 해는 중천에 떠 있지만 숲 속에는 나무들이 만들어 준 그늘이 있어 걷기가 좋다. 오늘은 바람 까니 살랑이니 더욱 발걸음이 가볍다.


해넘이전망대 쪽에서 바라보면 부석면 넓은 들판이 보이고 멀리 바다가 보인다. 불어오는 산바람이 참 좋아 바람에 몸을 맡겼다. 다시 부석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일주문에 도착하니 지난주보아 훨씬 많은 수국이 피어 반겨준다. 주차장에는 나들이 나온 차량들로 붐비고 가족끼리 수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청색, 흰색, 분홍색, 보라색 다양한 수국이 함박꽃처럼 크게 피어있어 탐스럽다. 부석사까지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차량은 주차장까지 갈 수가 있다.


수국이 피어있는 길을 따라 한참을 헥헥 거리며 올라간다. 길옆의 탐스러운 수국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우리 마당에도 수국이 있는데 잎사귀만 자라고 꽃을 피우지 않는다. 한참을 바라보니 새로 자라 줄기에서는 꽃이 피지 않고 대가 있는 가지에서만 꽃이 피는 것을 발견했다. 집에 가서 한 번 봐야겠다. 조금 걸어가니 부석사 주차장에도 차가 가득 찼다. 더위를 피해 숲 속으로 나들이 왔나 보다.


'사람이 아프면 회복할 때 먹는 음식이 흰 죽입니다. 지치고 힘들 때 흰 죽처럼 몸과 마음을 다스려주는 것이 바로 쉼입니다' 부석사 템플스테이를 홍보하는 플래카드에 쓰인 말이다. 초입에 부석사다원이란 찻집이 있다. 걸어서 땀에 전 모습이지만 용기를 냈다. 들어가니 전창으로 된 정면에 부석사 너른 들판과 바다가 보인다. 바로 앞에 있는 오래된 팽나무와 소나무가 아름드리 뻗어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쌍화차 한 잔을 시켰다.


네모난 공간에 다섯 개의 테이블이 놓여있고 저마다 테마가 있다. 탁자 위에 작은 화병에는 보랏빛 꽃 한 송이와 초록잎사귀를 꽂아놓아 운치를 더했다. 천정의 보에는 실링팬 두 개가 천천히 돌아가 시원하다.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보니 조금 더 시원한 느낌이다. 따뜻한 쌍화차가 묵직한 청화백자색에 둥글고 넓적한 찻잔에 담겨 나왔다. 빨간 대추를 편으로 썰어서 띄웠고 견과류가 듬뿍 띄워져 있다. 수저로 한 입 떠서 먹으니 약간 쓰면서 달달한 맛이 좋다.


휴일이 주는 여유로움, 온전히 내게 집중하는 시간, 돌아보면 나의 인생도 쌍화차처럼 그러하였다. 달콤하기도 하고 씁쓰레도 했다. 그럴 때마다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알지 못하는 길을 이정표도 없이 걸어왔던 시간이 쌓여 지금이 되었다. 실수하면 다시 해냈고, 모르면 배웠다. 넘어지면 일어나는 법을 배웠고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부지런히 걸어왔던 날.


현재는 여유로움을 배워가는 중이다. 바삐 가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돌아볼 줄 안다.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고 힘들면 포기하고 돌아오는 법을 안다. 쌍화차 한 잔을 놓고 잠시 나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숨도 고르고 멈춰서 풍경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이 쉬는 모습도 바라본다. 삼십 분의 시간은 전환점이다. 쉼을 갖고 나니 마음도 여유로워지고 몸도 충전이 되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사로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한적한 숲이 주는 위로를 받으며 걷는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견딘 나무들이 아름드리 서 있다. 웅장한 바위들도 세월을 견디며 한 자리에서 묵묵히 비도 맞고 바람도 견디며 굳건히 견뎌냈으리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낸다. 터벅터벅 걷는 나의 발걸음은 다시 나를 어딘가로 향하게 한다. 나의 길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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