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쓰면 가지런해진다

필사 방법

by 춤추는 소나무

저는 매일 아침 눈 비비며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책상에 앉아 글씨를 쓰는 일입니다. 소위 ‘필사’라는 것인데, 정해놓은 공책에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글씨를 쓰죠. 이 일을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 쓴 노트가 6권, 지금 쓰고 있는 노트가 2권인 것을 보면, 대략 2년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필사’를 하는 이유로 주로 필사하는 책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면, 필사한 내용은 그냥 읽고 만 것보다 기억에 잘 남는다거나, 좋은 글귀를 필사하다 보면 어휘나 표현력이 좋아진다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따라 쓰다 보면 그 작가의 문체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글에 배어든다는 등 주로 필사하는 내용에 대한 것들이 많습니다.


저도 이런 의견에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제가 거의 매일 빼먹지 않고 ‘필사’를 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글의 내용보다는 글씨 쓰는 일 자체를 좋아합니다. 소위 서예를 하듯이 글씨를 한 자 한 자 정성껏 쓰는 일을 좋아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아무 글이나 적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요. 그동안에는 법정 스님의 글을 많이 적었고, 최근에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글을 주로 필사합니다.


저는 필기구와 종이에 예민한 편입니다. 옛말에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제 경우는 필기구나 종이에 따라 글씨가 잘 써지기도 하고 못써지기도 하더군요. 명필이 아니니 붓을 가리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사 초기에는 ‘딥펜’이라고, 나무로 된 펜대에 펜촉을 꽂아 잉크를 찍어 쓰는 방식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다소 번거롭기는 해도, 나름의 운치도 있고 펜촉이 종이에 닿는 사각거리는 느낌도 좋아 한동안 그렇게 썼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번거로운 것은 오래가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글씨를 쓸 때마다 펜과 펜촉, 잉크를 준비하고, 다 하고 난 다음에는 그것들을 치워야 하는 일이 점차 귀찮아지더군요. 급기야는 저도 다른 필사하는 분들처럼 만년필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종이도 처음에는 두툼한 캘리그래피용 낱장 종이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그냥 두툼한 노트를 사용합니다. 집에 한 권, 가게에 한 권을 두고 틈날 때마다 글씨를 씁니다. 글씨를 쓸 때는 다른 생각이 안 드니,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 싶습니다. 참, 만년필도 집에 3개, 가게에 2개를 각각 두고 그날그날 기분 내키는 대로 펜을 집어 들고 씁니다. 기분이 소심해질 때는 가는 펜촉(EF)으로, 반대로 대담해질 때는 굵은 펜촉(M)을 주로 사용하죠.


만년필을 다섯 개나 두고 쓰는 것이 나름, 호사라면 호사일 수도 있는데, 대부분 싼 것들이고 요즘은 밖에 나가 술을 먹든가 하는 일도 거의 없으니, 이 정도의 호사는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 필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몇 년 동안 매일 글씨를 썼으니, 웬만하면 저한테 맞는 필체가 형성됐을 수도 있을 텐데, 아직도 쓸 때마다 글씨가 제각각입니다. 어떤 때는 길쭉하면서 단정한 글씨체가 좋아 며칠간 같은 필체로 쓰다가, 뭔가 너무 다소곳해 내 안에 있는 야성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일필휘지 하는 느낌으로 활달하게도 써봅니다. 하지만 그런 글씨는 발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공허한 느낌을 줘 금방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씨는 샌님이 쓰는 것처럼 단정한 글씨와 호연지기가 느껴지는 활달한 글씨 사이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마음에 드는 글씨체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글씨체라기보다는 글씨를 쓰는 방법 혹은 자세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네요. 획을 그을 때마다 글씨 모양이나 방향 등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글씨를 천천히 쓰는 것입니다. 획을 그으면서 처음에 약간 삐뚤어졌다면 그것을 수정해 가면서 획을 긋지요. 그다음 획은 앞의 획을 봐 가면서 잘 조화되게 획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글씨를 쓰다 보면 더디기는 하지만, 다 써놓고 보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썼을 때보다 글씨가 가지런해 보입니다. 마치 집 안 청소를 한 후의 모습 같다고 할까요. 어차피 글씨를 빨리 써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그동안 왜 글씨를 천천히 쓸 생각을 못했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무엇에 쫓기듯 글씨를 써 왔는데, 앞으로는 글씨를 좀 천천히 써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글씨체를 형성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안 오면... 할 수 없고...

작가의 이전글소상공인과 아내의 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