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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소나무 Aug 27. 2024

기미

2년 전 <쿠키뉴스>에 썼던 글인데 몇 군데 손봐서 다시 올린다.

    우리 집은 산 중턱에 있다. 집 뒤로 산이 겹겹이 있고 앞으로는 삼면이 툭 터져서 눈에 보이는 하늘이 크고 넓다. 집 밖으로 나오면 항상 전면으로 커다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부터 하늘이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습관이 생겼다. 요 며칠은 파스텔 색조의 밋밋한 푸른 하늘에 미세먼지인지 황사인지가 뿌옇게 끼어있는 모습으로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어떤 때는 하늘의 변화가 아주 극적일 때도 있다.     


   지난겨울 멀건 대낮에 갑자기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끼고 눈발까지 휘날리며 날씨가 험해졌다. 바람이 금방이라도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세차게 불었다. 그런 때는 꾸역꾸역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가기 마련인데 그날은 무슨 심사였는지 집 처마 밑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우두커니 하늘의 변화를 지켜봤다.    

 

   논과 밭,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들어가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만 이따금 지나갈 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먹구름과 거센 눈발만 난무했다. 마치 이 세상은 자신들 것이라고 방자하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거센 눈발이 휘날리더니 저 멀리 동쪽 하늘 귀퉁이에 파란 조각 하나가 생겨났다. 그 파란 조각은 먹구름 뒤에 있는 맑은 하늘인 듯싶었는데 먹구름의 위세가 하도 대단하여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내가 잠시 딴생각하는 사이에 파란 조각이 조금 커진 듯하더니 갑자기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그 파란 조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 하늘 일부를 차지할 만큼 커졌다.   

   

   처음 그 파란 조각이 커지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것이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먹구름에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파란 조각이 먹구름에 비해 너무나 작았고, 자라나는 속도도 매우 더뎠으니까.      


   그런데 파란 조각이 어느 정도 커지자, 상황이 급변했다. 뜨는 파란 조각과 지는 먹구름 사이의 대결 구도라고나 할까. 먹구름이 파란 조각의 기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 대목에서 안타까웠던 것은, 파란 조각이 처음 생겨났을 때나 커지기 시작한 시점, 다시 말해 세력을 형성해 나가던 중요한 시점의 미묘한 변화 양상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는 것.   

   

   살아오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런 중요한 순간은 항상 도둑처럼 온다. 내가 딴생각하거나 한눈을 파는 등으로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 혹은 다른 것(이 경우에는 먹구름과 비바람)에 현혹되어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 슬그머니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태 진전의 변곡점을 이루는 중요한 순간을 자세하게 관찰한 적이 거의 없다.   

  

   아니면 상상력 결핍으로 상황을 편파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작고 연약한 새싹에서 성장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이 장대하게 성장한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상상의 영역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크고 강성한 것들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작고 연약한 것들이 도약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도 함께 본다. 작고 연약한 것들로부터 장성한 모습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분석은 종합적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들은 현재 시점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크고 강성한 것들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그들에게 작고 연약한 것들은 성장 잠재력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당장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점은 편파적이다. 파란 조각이 커가는 중요한 변화의 순간을 놓친 이유가 혹시 내 관점이 편파적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한번 밀리기 시작한 먹구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가지 않아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고 쾌청하게 바뀌었다. 지금까지 관찰한 하늘의 변화 중에 가장 극적인 날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처마 밑에 앉아 하늘을 보기 시작하고부터 30분 남짓 만에 일어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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