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거래 장터에 가서 내가 할 일을 찾았다.
물론 익숙한 장소나 낯익은 것이 새롭게 보이는 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어떤 깊은 깨달음이나 심리적인 충격 등에 수반되는 것으로, 일상에서는 드물다.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나에게 익숙지 않은 환경이나 처음 가 보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할 확률이 훨씬 높다.
평소 알고 지내는 어떤 분으로부터, 자신은 유명 서점의 인기도서 목록을 자주 참조하는데, 인기도서 열 권 중 적어도 5권 이상은 항상 보려고 한다. 특히 젊은 작가들이 쓴 작품은 빼놓지 않고 읽는다는 말을 듣고 인상 깊었던 적이 있다. 그분이 70이 넘은 연세에도 항상 “어디 재미있는 일 없나”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띠는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일은 나에게 낯선 일이다. 식품제조업을 시작한 지가 올해로 11년째라 이런저런 다양한 경험을 해봤지만, 직거래장터에서 장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손님들에게 제품을 홍보하고 물건을 파는 것은, 그동안 자주 참여했던 식품 전시회 등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전시회가 ‘모의 훈련’ 느낌이라면, 직거래장터에서 장사하는 일은 ‘실전’ 같다고나 할까. 느낌이 다르다.
내가 시장에서 장사한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도 색다르게 느끼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시장에서 장사할까”라고 측은하게 보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귀농’이니 ‘목수’니 하면서 그동안 잘난 체하더니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그래, 이제 그만하고 서울로 돌아와~”라고 한다. 마치 사는 데 정답이 있다는 듯이.
나에게 익숙지 않은 환경(장터에서 장사하는 일)에 처하다 보니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일거리가 생겼다. 시장에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일이다.
이전 글(“태도에는 평가가 담겨있다.”)에서 나는 시장 상인들 워크숍에서 주제 발표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 발표 이후 시장에서의 내 위상에 변화가 생겼다. 이전까지는 그저 올해 처음 시장에 온 신규농가에 불과했다. 그런데 발표 이후에는 시장 사람들이 모두 아는 유명 인사(?)가 됐다. 우리 부스를 지나치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치회 회장이나 감사 등 소위 시장 실세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의견을 물어보러 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장 내에서의 내 위치가 독특하기는 하다. 육상으로 말하자면, 400미터 주자라고나 할까. 400미터를 뛰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부터 100미터 뛰듯이 전력 질주하면 300미터 이후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장거리 뛰듯이 여유 있게 뛰다 보면 다른 주자들을 따라갈 수 없다. 적절한 페이스 조절이 어떤 경기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 이유가 단거리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원(근육 속에 있는 글리코겐)과 장거리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원(지방 등)을 동시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시장에 참가하고 있는 농가들은 농작물 생산이나 장사에는 익숙하지만, 정부 정책이나 시장 운영 등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장거리 선수가 단거리 경주에는 익숙지 않은 것과 같다. 반면에 나는 40대 후반까지 정부에서 일했고, 이후 식품제조업을 하고 있어서 마치 400미터 선수처럼 양쪽을 모두 경험했다. 모르기는 해도 나와 같이 ‘행정’과 ‘장사’를 모두 경험한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나는 요즘 정부의 ‘농산물 직거래 활성화’ 정책에 관한 연구자료들을 보고 있다. 오랫동안 하던 일이라 익숙하다. 오랜만에 관계 법령이나 정책자료들을 읽고, 관계자들과 토론하는 일이 재미있다. 특히, 이 일이 나를 포함한 140여 농가의 생계가 걸려있는 문제라 더욱 관심이 많이 간다. 이 시장에 오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