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알 수 없음과 실존적 선택
요즘 인터넷과 댓글들을 보면 종교에 대해 불가지론이니, 무신론이니 하는 말들이 많다. 특히 '불가지론'이라는 말은 거의 밈 수준이다. 요즘같이 팍팍하고, 살기 힘들고,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태에서, '불가지론'은 마치 생각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의 기본 소양처럼 여겨진다. 그 글과 댓글들을 보며 잠시 나 스스로의 종교관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종교가 있는가? 일단은 없다.
그렇다면 무신론자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유신론자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불가지론자인가? 그렇다면 이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잠깐.
불가지론이면 신이 있다고 보는 걸까? 없다고 보는 걸까? 물론, 질문이 틀렸다. '불가지론'은 '알 수 없다'라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애초에 신의 존재 유무를 알 수 있긴 한 걸까? 유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알거나 증명해서, 반대로 무신론자는 신의 부재를 증명하거나 이해했기 때문에 믿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이 질문이 바로 오늘 고민의 핵심이다. 만약 어떤 대상이 논리적 증명이나 경험적 검증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거나 '안다'고 말할 뿐, 굳이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해는 이성의 영역이며, 경험의 결과이니까. 물론 철학적으로 엄밀한 인식론의 입장에서 지식은 '정당화' 된 '참'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된다(JTB: Justified True Belief). 하지만, 인식론에서 다루는 '참'에 대한 '믿음'과 신앙에서의 '믿음'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식의 영역에서 '믿음'은, '정당화된 참'에 대한 것, 즉, 수용의 문제이지만, 신앙의 영역에서 '믿음'은 '믿음'을 통해 '참'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 즉, 의지의 문제가 된다.
(어쩌면, 어떤 반신론자 혹은 반종교주의자들에겐 '정당화(Justified)'라는 단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 어휘는, 단지 전통적인 인식론적 철학에서 '앎에 대한 정의(Justified True Belief)'에 사용되는 어휘를 그대로 사용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정당화'라는 단어가 적어도 당신에게는 '진리'를 강제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종교적 강제가 아닌 철학적 어휘일 뿐이니까.)
만약 우리가 우주의 모든 원리와 현상을 파악하는 전지(全知)의 존재라고 가정해보자. 그 존재에게 '믿음'이란 가능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 존재에게 세상 모든 것은 참과 거짓으로 구분될 것이다. 모든 것이 '이해'의 영역으로 환원될 때, 믿음이 설 자리는 사라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유한함과 '알 수 없음'이야말로 믿음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토양임을 증명한다. 결국 믿음은 본질적으로 불가지론(Agnosticism)적 요소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믿음의 자리는 앎의 영토가 끝나는 바로 그 경계, 즉 이성이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무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성은 신앙이 '불합리'하거나 '모순'되지 않음을 변호하는 문지기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성은 결코 신앙의 토대가 되거나, 그것을 '뒷받침'할 수 없다. 신앙의 대상이 이성으로 완벽히 증명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닌 철학이나 과학의 일부가 될 뿐이다. 이성은 이 믿음의 영역 앞에서 멈춘다. 아니, 이성이 멈춘 영역에서 비로소 '믿음',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알 수 없음'을 정직하게 마주한 불가지론자의 입장에서, 신앙은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바로 이 지점, 즉 이성이 멈춘 '알 수 없음'의 심연 앞에서 신앙을 선택하는 인간은 두 가지 단계적 반응과 선택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반응이 합쳐져 비로소 '믿음'의 본질을 이룬다.
첫째는, '기대(Expectation)'라는 지향적 상태(State)이다. 이것은 모든 신앙자들이 갖는 '상태'이며, '알 수 없음'을 단순한 공백(Void)이나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너머를 향해 긍정적으로 열려 있는 마음의 '방향성'이다. 이는 "비록 알 수 없지만, 그곳이 무(無)는 아닐 것"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이며 '희망'이다. 이것이 바로 '도약'을 위한 논리적 전제가 된다.
둘째는, 이 '기대'를 전제로 하여 감행하는 '실존적 도약(Leap)'이라는 행위(Act)이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제시한 것으로, 이성적 판단을 유보하고, 그 불확실성과 부조리를 끌어안은 채 벼랑을 뛰어넘는 주관적 '결단'이다. 이성이 제공하는 안전한 땅을 벗어나 '알 수 없음'의 영역으로 의지를 던지는 동적(動的)인 행위이다. 이것은 "나는 믿기로 '선택한다'"는 용기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도약과 기대는 분리될 수 없다. '기대'라는 열린 상태(전제)가 없다면 '도약'(행위)은 맹목적인 추락에 불과할 것이며, '도약'이라는 결단적 행위가 없다면 '기대'는 막연한 바람에 머무르거나 두려움에 그칠 것이다(사실 내가 그렇다). '기대'는 '나의 바람이 무엇을 향하며 어떤 상태로 열려 있는가'라는 지향적 상태이고, '도약'은 '그 바람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기대에 대한 결단적 행위가 된다.
결국 불가지론자에게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는, '이해'나 '앎'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선택'의 앞에 서있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것은 증거에 기반한 '결론'이 아니라, 이성이 멈춘 그 자리에서 감행하는 '결단'이다. 이 '실존적 선택'이야말로 앞서 논의한 '도약(Leap)'의 본질이다. 이성이 제공하는 안전한 땅을 벗어나 '알 수 없음'의 영역으로 의지를 던지는 동적(動的)인 행위.
그리고 감히 고하건대, 어쩌면 모든 종교와 신앙의 깊이와 정도는, 그 불가지론적 영역에서 자신의 '선택'과 '기대'에 무게중심을 싣느냐, 아니면 종교가 제시하는 '믿음과 신앙의 체계'에 무게중심을 싣느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믿음'과 '앎'을 혼동하거나, 믿음을 '불확실한 앎' 정도로 격하하여 취급하곤 한다. 그러나 "알 수 있어서 믿는다"는 말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앎'을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공격적인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공격이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런 경우도 종종 있지만,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다수는 단지 '종교'는 비이성적이다. '믿음'은 과학적이지 않다. '신'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증명되지 않은 것을 왜 믿느냐?' 하는 피상적인 수준의 비판에 그친다.
결국 본인들도, 그들도, '알 수 없다'는 것은 똑같은데, 단지 '어떤 자세'를 선택했는가를 가지고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매도한다. 나는 이 기류가 다소 불편하다. '믿음'은 단지 '앎'의 부족한 형태가 아니다. 아무리 이성의 영역이 확장되어 앎의 영역이 넓어진다 하더라도, 진리 자체를 깨닫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은 언제까지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믿음은 바로 그 앎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한 인간이, 이성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감행하는 가장 용기 있는 응답이 된다.
물론, 그 용기는 '신의 부재'를 긍정한 절대적 실존자로서의 선택을 통해 무신론적으로도, '불가지'라는 믿음 자체를 굳건히 지키는 자세로도 발현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형이상학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살아있는 인간을 가치 창조의 제1근원으로 삼는다는 것에서, 또 다른 형태의 믿음, 즉, 무신론 혹은 불가지론이라는 신앙이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믿음은 알 수 없는 영역을 향한 '실존적 선택'이며, 그 선택을 감행하는 '도약'이고, 그 선택의 기저의 방향성인 '기대'의 결과물이 된다.
그러나, '종교체계'나 '왜곡된 믿음'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비판이 아니라, 단지 '믿음' 그 자체를 '비이성', '비논리', '두려움'의 결과물로 격하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해석적 폭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앎'이 없다면 단 한 발짝도 내딛을 생각이 없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폭력. 그들이 갖고있는 무신론도, 불가지론도 믿음으로서 갖는 신념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단지 '과학이 없다고 하니까 없는 거지'라는 앵무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매양 무시하며 비아냥거리는 '종교 간의 폭력성과 배타성, 해석의 전쟁'을, 그저 간판만 '반종교주의'로 갈아 끼운 채 똑같이 참전하는 그런 모습들이 반복된다.
오로지 자신만이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오만한 이들이,
알 수 없음 앞에서 믿음이라는 겸손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던지는 돌멩이가 아닐까.
지금까지 유신론자들을 위한 불가지론자의 변호였다.
왜냐면, 오늘은 일요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