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만난다.
가족을 잃은 사람.
건강을 잃은 사람.
오늘은 가족을 잃은 사람을 만났다.
가장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헛헛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이다.
멀리 살고 있는 하나뿐인 언니가 함께 지내며 상실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
나는 가족을 잃은 그분과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주었다는 이유로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중이다.
바꿀 수 없는 상실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당황하며 현실을 부인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 평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분노와 원망과 불안이 온 마음을 점령한다.
자칫 심연으로 빠져들면 감정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정체에 빠지기도 한다.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좋지 않다.
울고 싶을 때 울고, 그립다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것.
아주 사소하지만 사소해서 간과하는 것 중 하나이며 이 사소함이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는 작은 구멍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한다.
부정적 감정을 모두 통과하고, 항복하고, 놓아 버리고 나면, 마침내 감정이 해소되면서 전처럼 고통을 겪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임은 감수와 다르다. 감수하면 여전히 이전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감수할 때는 실상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고 미룬다. 감수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참아야지, 하는 것이다. 받아들임과 함께 실상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다. 따라서 받아들임의 징후 중 한 가지는 평정이다. 받아들임과 함께 분투가 끝나고 새 삶이 시작된다. 부정적 감정에 묶여 있던 에너지가 풀려나면서, 그 사람의 건강한 측면이 되살아난다.
- 놓아버림, 데이비드 호킨스.
남편을 잃은 분은 죽음을 부정적 감정에 포함시키지는 않으신 듯하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며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죽음도 삶도 신의 섭리 가운데 하나이며 어느 것도 비정하고 정당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했다.
죽음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잠깐의 잠이며 병을 앓았던 남편은 지금 평안함 가운데 있다는 굳은 믿음이 그녀에게 동일한 평안함을 주었다.
그러면서 두 자매가 알토와 소프라노로 성가를 불러주는 가운데 나는 갑작스러운 천국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지!!
진정 죽음은 노래와 감사와 인정과 받아들임 가운데 꽃다발처럼 놓여있는 것이다.
언니는 홀로 된 동생을 위해 나와 동생이 자매처럼 지내길 부탁하신다.
내 생에 없던 언니가 생기는 것이 다소 낯설지만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어 작은 기적을 내 맘 속에 들여놓는다.
그럴게요. 저도 기뻐요.
하고 말했다.
어제 읽었던 애덤스미스는 자리심에 대해 말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사실은 모두 추구하며 살았으면서도) 금기시했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조금은 자연스러워졌다고 할까?
그것을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는 것은 비열해 보인다고까지 말한다.
내 자리심도 발동한 것이다.
홀로 있을 그녀를 자주 확인할 수 있어 안심이 된다는 이익과 그녀와 같이 있으면 내가 배울 게 많다는 이익이 예쓰라는 대답을 하게 만들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