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들 Top 10

by 김지환

인생 영화라는 건 그 의미가 불분명하고 또한 누군가의 영화관을 지나치게 집약할 수 있는 용어이지만, 그만큼 누군가에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소개하기 좋은 용어로써 대체되기도 어렵다. 이 글만으로 나의 영화 관점을 설명하기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소개된 영화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 자체로 너무 만족스러울 것 같다.


아래는 내가 비교적 가장 높게 평가하는 10편의 영화이다. 순위는 사실상 의미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1. 셜록 2세 (1924) - 버스터 키튼

어쩌면 영화의 형태 중 가장 순수한 형태는 무성 영화가 아닐까 싶다. 소리의 부재라는 그 기술적 한계가 (당시에는 한계가 아니었겠지만) 오히려 인물의 동작, 미장센으로 모든 걸 표현해 내는 가장 기본적이고 영화적인 요소를 순수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셜록 2세>는 그 무대로 가상의 영화 속을 채택하여 그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버스터 키튼의 순수한 몸짓을 말 그대로 감각하게 한다. 당시로서도 정말 혁신적인 스펙타클이었고 지금에 와서도 그 생명력은 꺼지지 않았다.


2. 왜건 마스터 (1950) - 존 포드

존 포드의 서부극 영화를 단순한 인종주의로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의 영화를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실체 없는 사조로 뭉뚱 그리는 것도 옳지 않다. 서부극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 황야 안에서의 인물들의 드라마, 활극의 역동성 등을 영화적인 리듬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지 선과 악 따위로 작품을 나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이분법에서 자유롭게 영화적 리듬을 뽐내는 존 포드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게 서부극의 미학이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왜건 마스터>이다.


3. 영화사 (1998) - 장 뤽 고다르

(당시 기준으로) 18세기말부터 시작해서 약 100년 간 이어진 영화의 역사를 한 작품으로 설명해 내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영화사를 자신의 관점대로 자르고 붙이며 자신만의 영화 에세이를 만들어낸다. 그 누구의 관점에도 매몰되지 않고 영화를 오로지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영화는 명백히 압도적이며 나로선 그저 감탄만 나오게 한다.


4. 불명예 (1931) - 조셉 폰 스턴버그

이 단순해 보이는 스파이 영화에는 그 어떤 영화도 가지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를렌 디트리히'라는 위대한 배우는 눈빛만으로도 모든 걸 표현해 내고, 스턴버그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다층적인 텍스쳐로 하나의 영화적 시를 만들어낸다. 아마 스턴버그-디트리히 조합은 영화사에 다시는 없을 강렬한 조합 중 하나가 아닐까. <색, 계> 같은 현대 대부분의 스파이 영화들이 닿지 못한 지점을 1930년대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5. 홀리 모터스 (2012) - 레오 까락스

드니 라방이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그에게는 대부분의 배우들에게서 볼 수 없는 무성 영화적 아우라가 있다. 그런 그를 주연 배우로 차용한 이 영화는 '연기의 지속'을 말한다. 21세기에 들어서 영화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했지만, 그 순간에서조차도 <홀리 모터스>는 서사가 아닌 배우의 움직임을 긍정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시대역행적이지만 이보다 영화적으로 과거의 노스탤지어를 표현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가장 21세기에 걸맞은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6. 세자레 (1978) - 마르그리트 뒤라스

어떤 재현도 포함하지 않은 영화를, 심지어 제공된 영상조차도 장편에서 삭제된 부분을 편집한 영화를 제대로 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물론 나도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백설공주>처럼 시각적 요소를 과하게 차단하는 영화에 관해선 다소 회의적이긴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실의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여 텍스트로 그 빈 공간을 채워 보이지 않는 가상의 영화적 공간을 생성하는 영화이다. 난 그 과정을 영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7. 클로즈 업 (1990)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라는 건 사실 우리와 가깝게 있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와 멀게 느껴지게 되는 매체이다. 우리는 영화 속 등장하는 누군가에게 의식을 의탁하여 현실과의 거리감을 좁히지만, 그 과정은 불안정하고 쉽게 끊어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영화가 직접 허구라는 것을 드러낸다면? 놀랍게도 영화가 우리와 매우 가깝게 밀착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감독인 키아로스타미가 등장하는 순간, 차 안에서 인물의 모습을 찍으며 기술적 결함이 등장하는 순간.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8. 거울 (1975)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기억이라는 것은 선형적인 서사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장면들이 파편적으로 결합된 어떤 덩어리에 가깝다. 그 공간은 물리적으로 완벽하지 않고 기억의 주체에 의해 변형되기도 한다. 이런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영화가 바로 이 영화가 아닐까. 선형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순간을 거울에 봉인하여 그 순간을 관객이 직접 느끼게 하는 <거울>은 항상 시간과 영화의 관계를 탐구하던 타르코프스키의 최고작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 것이다.


9.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 - 홍상수

보는 이가 모르는 것을 영화로 보는 것에 대해 문제 삼는 경우는 없지만, 영화 감독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담으려고 하는 건 꽤나 위험한 선택이다. 그 소재에 대한 감독의 주관적 견해가 그것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이런 위험성을 파악하고 배우들에게 현저히 적은 정보를 제공하여 허위 없는 날 것의 연기를 만들어낸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홍상수의 영화 중에서도 그런 연기의 앙상블이 가장 잘 이루어져 두 배우, 두 챕터의 연기 사이의 어떤 팽팽함과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 영화를 감상한 경험은 아마 평생토록 내 한켠에 남아있지 않을까.


10. 중경삼림 (1994) - 왕가위

삶은 무한하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무한할 수 있을까. 우린 모두 시간이 지나 멸할 운명이고 사랑은 그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소멸된다. 하지만 한 순간을 필름으로 영원히 담을 수 있다면, 이를 통해 그 영원을 잠시만이라도 꿈꿀 수 있다면, 그걸로도 우린 충분하지 않을까. <중경삼림>은 황홀한 순간을 필름에 박제시켜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공간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