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위한 수양. 타자를 위한 배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와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

by 산 헤드린

들어가는 글

우리는 매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이 옳은지, 어디까지가 나의 책임인지,

나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판단합니다.

삶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결단의 상황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옮음과 그름이라는 윤리적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정작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면,

우리는 종종 도덕 교과서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윤리를 도덕 교괴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묻는 사유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20세기 철학자 레비나스를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철학이라는 학문을 사변적이고 어렵게 생각하나,

고대에서부터 철학자들은 각각 어떻게 살 것인지 윤리적인 고민에서 사상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어떻게 덕을 기르며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는 지를 질문합니다.


한편 레비나스는 윤리를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합니다.

레비나스는 타자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 지를 질문합니다.

그는 윤리가 규칙이나 성품 이전에,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두 철학자의 관점이 다르면서도,

서로 동일한 윤리적 지평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철학자는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를 사용하지만,

오늘날의 윤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글은 그 두 사상을 되새기면서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체의 행복 ─ 윤리의 목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는 행복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덕을 잘 수행할 때 성취됩니다.

그리고 덕은 실천적 지혜가 길러진 상태 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지혜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고,

덕은 인간이 잘 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성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덕의 표본이 바로 중용입니다.

중용은 상황과 인간에 따라 달라지는 올바른 선택의 지점입니다.

중용은 계산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형성된 판단 능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실천적 지혜입니다.

그는 실천적 지혜를 반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인간이라면 사리를 분별하고,

지혜로운 '덕'을 길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3. 삶을 판단하는 지혜

실천적 지혜는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이론적 지식과 달리,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선택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적 삶이란 규칙을 적용하는 삶이 아니라, 숙고하고 판단하며 선택하는 삶입니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는 개인의 완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 이해하며, 덕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고 봅니다. 이때 핵심적인 덕이 정의와 우정입니다.

정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공정을 지키는 덕이며, 우정은 공동의 선을 함께 추구하는 관계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실천적 지혜를 기를 때 덕이 생기고,

덕이 있는 삶을 살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낍니다.


4. 레비나스 ─ 타자, 주체의 덕 이전의 요청

레비나스는 윤리의 출발점을 근본적으로 전환합니다.

그는 윤리가 주체의 행복이나 완성에서 시작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말을 겁니다.

그 말은 명령이 아니라 호소이며, ‘나를 해치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이 요구 앞에서 나는 이미 책임을 지고 있으며, 선택 이전에 윤리적 관계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레비나스에게 책임은 이성적인 지혜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책임은 타자가 주체 앞에 나타나는 순간 이미 발생합니다.

그리고 주체는 타자의 취약성과 고통 앞에서 응답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의 윤리는 덕 윤리학과 달리, 윤리를 주체 완성 조건으로 삼지 않습니다.

윤리는 주체보다 먼저 타자에게서 주어집니다.


세상 일을 돌이켜 보면,

내가 준비된 문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에서는 큰 갈등도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은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주며, 우리는 타자 앞에 부족한 자신을 마주합니다.


5. 덕 윤리학의 확장 ─ 타자를 향한 중용

아리스토텔레스와 레비나스의 윤리는 서로 다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고,

레비나스는 타자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불려지는가를 묻습니다.

전자는 윤리적 삶의 형성과 지속 가능성을 설명하고,

후자는 윤리적 요청의 근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두 윤리는 대립하기보다 서로의 한계를 보완합니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볼 때, 덕 윤리학은 자기완성에 머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타자 윤리를 덕 윤리학 안으로 끌어들일 때,

덕은 자기 수양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성품으로 확장됩니다.

중용은 더 이상 나의 균형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필요 앞에서 지나치게 무관심하지도, 무력하지도 않게 응답하는 태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글 ─ 오늘의 윤리를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덕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이미 윤리적 존재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두 사상은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함께 읽을 때 오늘의 윤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윤리적 삶이란 나 자신을 완성하는 삶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얼굴 앞에서 응답하는 삶입니다.

덕은 책임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 책임은 덕이 자기만족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오늘날 윤리는 선택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슬기로운 타자 관계 또한 경쟁력이나 매력 그리고 자기완성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내가 안아야 할 책임과 나의 덕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