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자유롭다고 느끼는 착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노예 상태이다"
아메리칸 드림? 우리는 쉽게 이민이라는 단어를 농담삼아 입에 담곤 한다. 저성장에 접어든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이 나라는 답이 없다’는 이유로 이민을 입에 담는 이도 분명 심심찮게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생각을 잠시나마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으로 넘어간 친척, 외국인 친구들, 그리고 실제로 이민을 가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났을 때, 나는 내가 놓치고 있는, 나로서는 생각도 못 했던 그들의 고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으로 구성된 집단을 벗어난 적 없으면 아주 높은 확률로 간과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런 고민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직접 경험하거나 자세하게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내가 누군지 같은 사소한 고민이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그 자체로도 아주 중요한 문제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영향 또한 어마어마하다. 당신은 그 커뮤니티에 평생 녹아들지 못하고, 그 누구도 당신이 아주 숨 쉬듯 당연하게 여겨온 문화적 맥락을 이해해주지 않으며,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기에 누군가에게 토로할 수도 없다. 외국에 넘어가 산다는 것은 실로 무인도에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고통을 줄 수도 있는 일이다. <브루탈리스트> 를 단순히 이민자에 대한 헌사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시각을 조금 더 넓혀서, ‘짓밟히는(과정) 순수(목적)’에 대한 영화라고 하자.
영화는 헝가리에 살던 유대인 라즐로 토스가 피난선을 타고 미국에 도착하며 시작한다. 이 오프닝 신이 아주 압권인데, 처음에는 암전 속에서 음산한 분위기에 퍼커션이 반복적으로 울리며 라즐로의 아내 에르제벳이 보내는 편지를 에르제벳의 목소리로 읽어준다. 라즐로가 홀로코스트에서 막 빠져나온 세계 2차대전 시기이기 때문에, 이 모든 요소가 뒤섞이며 시대적 상황의 긴박함을 어떤 구체적 사건이나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전달한다. 그리고 라즐로의 시점으로 어두운 복도를 걸어나오며 웅장하고 희망찬 관악기 소리가 등장한다. 배 갑판으로 나온 라즐로의 눈에 뒤집힌 시야의 자유의 여신상을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하는데,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 이전의 시대적 상황을 5분 남짓한 사이에 전부 설명해줬다고 느꼈다.
라즐로는 미국으로 넘어와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신의 사촌, 아틸라의 가구점에서 일을 돕는다. 아틸라는 이미 미국으로 건너와 자리 잡은 사람이었는데, 본인의 성씨도 미국식으로 바꾼 상태였고 ‘여기 사람들은 부자 (아버지와 아들) 가 하는 가구점을 좋아한다’ 는 이유로 아들도 없는데 가구점 이름에 ‘& sons’ 를 집어넣고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민자로서는 참으로 모범적인 태도다. 아틸라는 라즐로 또한 그렇게 미국에 녹아들려는 노력을 하길 바라나, 라즐로는 방금 막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라즐로와 아틸라는 고객 ‘해리’가 독서광인 백만장자 아버지의 서재를 리모델링하는 의뢰를 맡기고 싶다며, 서프라이즈이니 아버지가 집을 비우는 동안 몰래 해달라는 부탁에 서재의 인테리어를 현대식으로 완전히 바꿔버린다. 책장은 벽 안쪽으로 모두 집어넣어 책장을 열지 않으면 책이 보이지 않도록. 그리고 서재엔 의자 하나만 놓음으로써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의 끝을 보여주는 서재로. 그러나 서프라이즈가 무색하게 아버지인 ‘해리슨 밴 뷰런’은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에 일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와 서재를 보고 말았고, 허락도 없이 서재를 어디서 본 적도 없는 형태로 바꿔버린 데 격노한 해리슨은 두 사람을 바로 쫓아내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아틸라의 아내의 모함으로 라즐로는 아틸라의 가구점에서 쫓겨나 배급소를 전전하는 건설 현장 노동자가 되고 만다. 그러던 어느날, 해리슨이 직접 건설 현장까지 라즐로를 찾아와 점심 식사를 대접한다. 라즐로가 리모델링한 서재가 인테리어 잡지에 실려 유명세를 얻게 되었고, 이에 해리슨이 뒤늦게 부랴부랴 라즐로를 찾아나섰던 것. 해리슨이 찾아보니 라즐로는 사실 구 독일의 세계 최초의 건축 학교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엘리트 건축가였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부다페스트의 공공기관 건물 건축도 맡았던 유능한 인물이지만, 나치가 바우하우스 스타일을 ‘비게르만’ 형식으로 규정하게 되면서 라즐로는 일자리를 잃었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살이까지 하다가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와 갈라져 미국으로 탈출한 것이었다. 해리슨은 라즐로에게 감사를 표하며, 라즐로를 자신이 여는 파티에 초대한다. 그 파티에서 해리슨은 라즐로에게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딴 문화센터를 자신이 사는 동네, 도일스타운에 지어줄 것을 부탁한다. 부자들의 대저택만 즐비했지 공공을 위한 인프라라곤 전혀 없던 깡촌이었던지라 라즐로는 망설이지만, 아내와 조카까지 미국으로 데려와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말에 이 부탁을 승낙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까지가 인터미션 전까지 부분이다. 영화가 3시간 4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간에 인터미션이 존재하고, 그 이후부터는 서서히 갈등이 전개된다. 두 사람은 공존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세 가지다.
라즐로는 유대교이고, 해리슨은 기독교도다. 해리슨 뿐만 아니라 그 동네가 아예 개신교 부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라즐로는 브루탈리스트다. 브루탈리즘은 1950~1970년대 유행했던 건축 사조로, 극한의 효율성에 집중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물의 대부분이 초대형 콘크리트로만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50년대 상류층 사람들의 시각에서 인테리어가 아닌 ‘대형 콘크리트 건축물’은 아주 차갑고 흉물스러운 인상을 준다.
라즐로는 자신의 에술적 신념과 자존심이 가장 중요한 예술가이며, 해리슨은 비용 절감과 평판, 명예가 가장 중요한 사업가다.
이런 이유들로 영화 내내 라즐로는 무시당하고, 교묘하게 배척당하고, 핍박당한다. 자신이 옥스포드에서 공부했음을 밝히는 아내 에르제빗의 앞에서 해리슨이 ‘당신 남편의 구두닦이 같은 억양 좀 고쳐달라’며 면전에 동전을 던지는 모욕을 겪고, ‘겨우 그 3-4미터 차이가 뭐라고 이렇게 짓느냐’며 비용 절감을 이유로 설계자인 라즐로에겐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설계도를 바꿔버리며, 조카인 조피아는 계속해서 해리슨의 아들 해리에게 희롱을 당한다. 원자재 운송 과정에서 사고가 나자 평판 훼손을 우려한 해리슨이 그 자리에서 공사를 중단시켜버리는가 하면, 일자리를 잃고 아내의 일자리가 있는 뉴욕에서 일하고 있던 라즐로를 법적인 소송 절차가 끝났다며 다시 불러버린다.
그래서인지, 라즐로가 짓는 건물은 지어질수록 어딘가 이질적인 건물이 되어간다. 영화에서는 문화센터의 내부를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분명 처음 의뢰를 받았을 떄 해리슨은 별 오만가지 시설을 다 요구했다. 도서관과 극장, 체육관과 예배당이 다 합쳐진 문화센터를 건립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처음 라즐로가 모형을 보여줄 때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도서관과 극장, 체육관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보여주는 것은 단 하나, 천장에서 십자가 모양으로 빛이 내려오는 예배당의 모습 뿐이다. 그러니까 이 건물은, 애초부터 라즐로가 도일스타운의 주류 고객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양식은 브루탈리즘, 자재는 콘크리트, 중요한 것은 오로지 예배당의 무식한 높이의 천장에서 내려오는 십자가 모양 빛. 라즐로는 그렇게 예배당을 설계한 이유에 대해 ‘이 커뮤니티에 혁신을 몰고 오기 위해서. 위를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답한다. 이 건물은 도일스타운을 위한 건물이 아니라, 라즐로의 예술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리슨은 라즐로의 그 예술적 역량에 반하지 않았는가? 해리슨은 그의 예술적 천재성을 흠모하고, 그와 대화할 때면 ‘지적 자극을 받는다’라고 감탄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프로젝트에 자신의 영감을 끼워넣고 싶어하고, 계속해서 침범하고 싶어한다. 앞서 언급했듯 그를 극진히 대접하지만 동시에 그를 깔본다. 사실 그는 처음 서재를 봤을 때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서재가 잡지에 실리고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자 그는 뒤늦게 라즐로를 찾는다. 그는 ‘자본은 충분하나 예술적 근본은 부족한’ 명예와 교양을 추구하는 1950년대의 미국 그 자체다. 처음 감명받았을 때는 예술을 온전히 존중해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종교적 이유로, 비용적 이유로 계속해서 침범한다. 영화 극초반부에 에르제벳이 편지에 인용한 말, “자신이 가장 자유롭다고 느끼는 착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노예 상태이다“ 라는 말은 끊임없이 착취당하는 라즐로의 모습을 닮았다.
순수함이 설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라즐로는 마약 중독자고, 매춘도 이용해봤고, 마냥 착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예술가 그 자체다. 그는 건설 예산이 부족하면 자신의 보수를 삭감하며, 자신의 앞가림도 안 되는 주제에 친구인 고든의 월급은 챙겨준다. 서재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화를 내는 해리슨에게 구구절절 자신의 이력을 읊으려 하지 않고 작품으로 말하려고 하며, ‘남들 밑에서 일하면 제대로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해리슨과의 대화에서 그는 건축을 선택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 ‘내가 지은 건물들은 다뉴브 강의 침수를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내 대부분의 건물들이 전쟁통에서도 살아남았다’ 라는 다소 뜬금없는 대답을 한다. 그의 지향점은 오로지 건물이 건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 영원히 그 자리에 남는 것이다. 종교니 명예니 돈이니 그런 것들은, 본분에서 벗어난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협이 없기 때문에 라즐로는 고통받는다. 영화 초반 라즐로를 모함해 쫓아낸 아틸라의 아내는 가톨릭 신자다. 그를 교묘하게 하대하는 해리슨 밴 뷰런 또한 유대교가 아니다. 애초에 이 이야기는 성공과 부와 명예를 꿈꾸는 야망있는 라즐로의 자진 선택한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헝가리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왔을 뿐. 그렇기 떄문에 영화는 라즐로가 ‘어떤 서사를 거쳐 성공하는지’를 다루지 않는다. 자유의 나라’였던 미국에서 그저 흔히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바랐던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그들의 모국에서의 엘리트 이력이 무색하게 힘든 생활을 이어나간다. 문화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도일스타운 사람들 또한 브루탈리즘 양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 중반에 다 자란 조피아가 자신의 약혼자와 시오니즘에 따라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할 때,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반대하며 ‘미국에서 사는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니?’ 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 이후 해리슨이 라즐로를 다시 건설 현장으로 부르고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유대가 찢어지며, 여러 고난 끝에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모든게 잘못됐다’는 결론에 다다라 이스라엘로 가기로 결심한다.
결론이 시오니즘 변호로 흐르는 거 같지만 에필로그를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 기분이 든다. 영화 처음부터 절대 말을 하지 않던 조피아가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는데, 말하는 내용을 보면 입을 여는 족족 자신이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 열성 시오니스트의 말만 하기에 보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혼란스럽다. 그런 조피아가 라즐로 회고전의 연설을 맡았으니… 라즐로의 의도가 과연 이게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며 영화가 끝난다. 이를 두고 라즐로는 시오니즘에게마저 왜곡되고 착취된다는 해석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자체가 참 불편한 경험이었다. 아마 좋은 뜻. 연출도 미묘하고, 음악도 미묘했다.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어딘가 불안한 음악이 나왔고,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내가 이민을 고민해본 적도 있고, 음악이라는 예술을 업으로 삼으려고 했던 적도 있어서 더 와닿았을 것이다. 둘 다 쉽지 않은 일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주류와의 타협, 때로는 자존심까지 버리고 허리를 숙이는 일이 필요하기 떄문이다. 이질적인 집단과 섞이며 내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힘이 들고 많은 수모를 겪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배척되지 않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굉장히 축복받은 일이면서 우리가 당연시한 나머지 간과하기 쉬운 일이다. 2020년대 전후로 우리나라의 문화적 영향력이 성장하면서 다른 국가에서 우리나라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일본에서 자이니치와 2000년대 이후 넘어온 한국인들에 대한 취급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이 나를 볼 때 같은 나라 출신이더라도 내가 주류가 아니라면 ‘어느 나라 출신’이라는 것으로 내 정체성을 가늠한다. 내 민족적 정체성은 이런 맥락에서 유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에서도 그렇게나 자신의 뿌리를 찾고 모국의 선전에 환호하는 것일 터다. 그래서 나는 사실 한국이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충 나라 망하면 이민해서 간다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타 집단에 녹아들든지, 혹은 그냥 뿌리 없는 이방인이 되든지 둘 중 하나다.
전체적으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힘든 영화였으나 한편으로는 라즐로와 에르제벳이 보여주는 지고지순한 사랑에 가슴이 미어지기도 했다. 두 사람은 끊어질듯 이어지는 위태로운 사랑을 이어간다. 주변 상황이 끊임없이 그들을 갈라놓으려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순수한 목적지와 추악한 과정의 구도로 대조될 수 있겠다.
올려다본 그 우상의 형태는 뒤집힌 모습이다. 라즐로가 처음 자유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올려다본 오프닝 장면의 자유의 여신상은 뒤집어진 형태. 해리슨이 그렇게 바라던 문화 센터의 예배당 천장 십자가 또한 올려다보면 뒤집어진 형태. 그 뒤집어진 형태는 불안정하고 보기 불편한 모습이다. 우리가 우러러보고 지향하는 이상향은 사실은 그렇게 이상하고 보기 불편한 모습일 것이다. 마약, 매춘, 라즐로와 에르제빗이 거쳤던 그 많은 고난. 빛나는 목적지의 이면엔 그런 추악한 과정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조피아가 라즐로 토스의 건축물을 해설하며 말하는 ‘우리에겐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가 중요했습니다’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민자의 성공, 자유의 여신상이라는 목적지 자체에 시선이 꽂혀 거꾸로 보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