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adcast X The Focus Group / 탐구생활 *납량특집
방송매체에 쓰이기 위해 개발된 많은 소리들이 기술과 공학의 영역에서 기어 나와 음악과 미학의 영역에 침투하기 시작하던 그 시대. BBC 라디오포닉 워크숍과 Delia Derbyshire이 사실상 이 모든 변혁을 주관했다. 그들에 의해 실험음악을 마주하는 새로운 TV/라디오 세대가 이룩했다. <닥터 후> 시리즈를 즐겨 시청한 당시 모든 영국인들이 이 세대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테이프와 라이브러리 뮤직으로부터 출발한 모든 괴상한 사운드에 꽤나 친숙하다. 이로부터 한참의 세월을 벗어난 우리와 달리 말이다. 사운드 콜라주, 뮤지크 콘크리트, 무그스플로이테이션 등 우리에게는 힙스터들끼리나 어설픈 탐구를 집요하게 반복할 뿐인, 늘 낯설기만 한 실험기법이나 장르일지도 모르나 그들에겐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사운드를 만들던 그들과 지금 그들을 찾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수집가'라는 것이다. 비록 송출이란 다소 공업적인 목적만을 위한 것일지라도, 테이프에 사운드를 녹음하고 이를 편집하는 데 저명한 클래식 작곡가 못지않은 천재적인 손놀림이 필요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소리들을 녹음할 것이며, 어떻게 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작할 것인가의 싸움이다. 그렇다면 원재료들, 즉 재주껏 만지기 좋은 소리들을 직감에 의존하면서도 신중하게 채집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했다. 필드 레코딩과 콜라주를 가장 잘하는 사람만이 이 일을 해야 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원재료들은 대개 자연과 일상으로부터, 그것도 아주 단편적인 순간들을 잽싸게 직접 캐치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워낙 광범위하고 우연적인 것들이라 제 아무리 실력을 갖춘 전문가라 할지라도 본인이 정확히 어떤 소리를 얻게 될지는 결코 알 수 없었으리라.
한편, 그렇게 치열한 창조를 이뤄냈던 그들의 결과물, 혹은 그에 따른 과정과 부산물이 우리 세대에 와서는 자료가 됐다. 아날로그 수집물의 출처, 녹음물의 취급, 전자음향의 조작 및 변형, 미디어상의 보급, 궁극적으로는 대중문화와의 융합 등에 대한 역사를 발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세대의 창조자들이 '음향'에 대하여 공학적/엔지니어링 예술을 펼쳐 왔다면, 우리 세대의 힙스터--앞서 나 같은 사람들의 비꼼을 다소 감수해야만 했던--들은 이러한 '음향 자료'에 대하여 고고학적/아카이빙 예술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의 공학적인 혁명은 특유의 괴기스러운 방식으로 인해 SF 판타지물과 곧잘 어울렸다. 그리하여 매트로폴리스로 말미암은 1920년대 이후, 온갖 펑크 세계관--특히 카세트펑크의 전신이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을 비롯한 일명 '레트로 퓨처리즘'에 가장 큰 모티브 중 하나가 됐다.
이는 우주나 로봇, 정보기술 등을 향한 환상이 꽃을 피우던 시대상과도 맞물린 결과일 테다. The Zodiac이 1967년에 발매한 앨범 <Cosmic Sounds>에서 원시문명과 퓨처리즘을 비주얼적으로 결합한 사례는 당대 사람들이 무엇에 흥미를 갖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중에서도 <닥터 후>와 대중 간의 성공적인 교감으로 인해, 그때가 어느덧 추억으로 남게 된 오늘날의 영국인들에게는 레트로 퓨처리즘이 흔히 '키치스러움'과 '노스탤지어', 혹은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아이러니함'라는 키워드로 각인돼 있다. 나름 낙천적이고 유쾌한 이미지지 않은가. 그것이 그들이 그때의 초현실적 낭만을 기억하는 방식이 됐다.
인간의 상상력이 기술을 만나 혁신과 동시에 새로운 낭만을 만들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또 다른 몽환이자 초현실로 인도했다. 그리고 이 또한 기억의 저편으로 점차 잊혀 갈 즈음, 누군가는 이를 재발굴하고 재해석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기억을, 아니 기억 속 어렴풋이 이름만 남은 잔해더미를 말이다. 그것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이제는 그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에 굳이 발을 들이는 짓과 같다.
지금 내가 한 비유가 곧 헌톨로지(Hauntology)의 개념이 된다. 기억의 잔재가 비가시적인 형태, 정확히 말해서 어떻게든 찾으면 보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 대하여 논한다. 현상학의 관점에서 이것이 마치 성불하지 못한 망령처럼 우리 곁을 맴돌며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닌다고 하여 우리말로 유령론이 된 것이다.
본디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이미 끝을 맞이한 줄로만 알았던 마르크스주의가 아직 현대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실체가 없을 뿐임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용어다. 그렇기에 이때는 유령(명사; 이름뿐이고 실제는 없는)이란 정의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우리 눈에 그것이 실제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을 비틀기 위한 의도로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영어권 국가가 서로 다를 것 없이, 유령이 어떤 의미로 쓰였든 초자연적인 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연상한다. 자꾸만 괴담으로나 받아들이던 것들을 끌어들인다. 본래의 개념 역시 비유적으로 '망령'으로서의 의미 또한 혼용한 것이니 잘못된 해석은 아니다.
대중문화, 대개 음악에서 논하는 헌톨로지란 레트로 퓨처리즘과 마찬가지로 영향으로서 잔존해 있는 문화사적 자료 및 개념들을 아카이빙하는 일련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로 당시의 초현실에 관한 당대의 상상을 함께 복각한다. 이렇듯 꽤나 넓은 의미를 가진 개념임에도 누군가는 단어가 가지는 심령주의적 뉘앙스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오컬트 현상 및 문화와 결부시키는 짓을 한다.
다시 말해 재발굴 현장에 대하여 놀이동산을 재건하는 노스탤지어, 혹은 위대한 문화역사를 후세에 전해 인류의 진보에 공헌하는 고고학으로 보는 것이 아닌, 엑소시스트를 동반한 채 측음기를 들고 폐허를 샅샅이 뒤지는, 즉 '섬뜩한 기이함'으로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들은 BBC 워크숍마저도 영매 의식으로 간주한다. 꼭 방송실 관계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녹음실을 찍은 흑백 사진으로부터, 구석 어딘가에 있는 조그마한 마녀 형체를 발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들 같다. <사일런트 힐> 시리즈에 나올 법한 이계를 재현하기 위해 잡동사니들을 덕지덕지 콜라주하는 이들이다.
심지어 반문화 및 사이키델리아에 관해서도 그들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받아들인다. 비과학으로나 환각적 현상으로만 치부한 채 무시했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바라보는 시도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또 모른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령의 실체를 마주한 사례도 있을지...
헌톨로지는 장르도, 특정 기법도, 스타일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또한 펑크나 라이엇 걸 같은 무브먼트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특수한 목적성을 행동주의적으로 주창하면서 들고일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경향'이라고들 한다. 이 단어가 그나마 이토록 천차만별에 명확한 정립조차 아리송한 '현상(심지어 집단이라는 말도 조심스럽기에)'을 포괄하기에 수월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레이블 Ghost Box에 한해서는 무브먼트라고 일컬어도 좋을 것 같다. 적어도 이들에게만큼은 헌톨로지가 분명 비전이었으며 그 움직임도 대담하고 일관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비전은 사이먼 레이놀즈가 '헌톨로지'를 규명하며 "썩어가는 기억과 잃어버린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에 집착"이라고 표현한 바와 맥락이 일치한다. 레이블 대표 줄리안 하우스도 설립 목적에 대하여 "잊힌 음악적 역사를 탐험하는 음악가들을 위함"이라고 공언했다. 그저 역사나 과거라고 표현하면 될 텐데, 구태여 '잊힌', '썩어가는', '잃어버린'이라는 형용격을 덧붙인다. 소실과 쇠퇴의 뉘앙스를 강조한다.
즉, 그들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옛 문화'보다는 범위를 좁혀 '유령화 돼가는 문화'가 정확하다. 또한 여기에 '영국성', 그리고 평행 세계라는 아이디어로 하여금 '판타지(혹은 어느 현실의 미지성일 수도 있고)'를 반영한다. 영국성을 반영한다는 것은 서론에 논의한 BBC 워크숍 전후로 발생한 여러 대중문화와 음향적 혁신을 충실히 계승하겠다는 말일 테다. 그렇다면 평행 세계 및 판타지의 반영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우선 분명 실재했었으나 시간성이라는 근원적인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해 지속성을 잃은 즉시 현재로부터 단절되면서 점차 소멸해 가는 불연속적인 우주가 있다. '실제 역사'라고 부르는 세계다. 다른 하나로는 녹음물의 우주가 있다. 실재하던 것이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반영속성을 획득하고, 다른 의미로서의 불연속성이 있긴 하나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유영할 수 있는 우주가 있다.
만약 전자의 세계에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어째서인지 듣게 되는 날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심령현상 내지는 미스터리일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세계에선 이를 들을 수 있다. 또한 전달 과정에서의 변형이 있을 뿐,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때의 그 실체가 맞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를 진보된 과학에 의한 합리적인 실현으로 볼 것인가, 판타지에 입각한 유령의 실체화로 볼 것인가.
종언 및 단절된 이후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던 것이 현존해 심지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러나 그것이 '실체의 부활'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 비로소 데리다 입장에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입해 이를 유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령 현상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고 탐구를 시작해 논의를 거듭하려 한다면 그것이 곧 유령론(Hauntology)이 될 것이다.
고스트박스가 정확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일명 심령탐지기를 고스트 박스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다만 그들은 탐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무당처럼 그것을 우리 앞에 불러일으켜 갈기갈기 찢어버리거나, 혹은 모종의 대화를 하는 것까지가 그들의 역할이다. 찢어버린다는 것은 해체주의적 접근을, 대화를 한다는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아카이빙이나 미학적 행위를 통해 연결을 도모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혼톨로지로 묶이는 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더 포커스 그룹이 가장 심령현상에 가깝도록 기이한 작법을 주로 쓴다. 앞서 <사일런트 힐>을 비유 소재로 쓴 바가 있다. 해당 시리즈에서도 라디오와 특정 소리가 핵심적인 공포 요소로 쓰인다. 이계로 진입한 이후로, 근처에 크리쳐가 있을 경우 라디오 신호가 이에 반응하여 노이즈를 일으킨다.
이는 곧 위협적인 미지의 존재로 하여금 인물과 관객(게임의 경우에는 플레이어)에게 긴장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이계에서만 발생하기에 왜곡된 무의식의 공간과 세계관에 대한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 소리가 왜곡된 정도가 심할수록, 그리고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수록 공간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질 것이다. 더 포커스 그룹은 소리를 극단적으로 해체하고 왜곡하는 것을 주력으로 삼는 집단이다. '사운드 콜라주'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불안정하고 불연속적일수록 그들 다운 소리가 된다. 때로는 음악으로 구분하는 것이 마땅한지조차 의문이 들 것이다. 그들은 워낙 극단적이어서 말 그대로 음향실험에 가깝다.
동시에 구마의식에도 가깝다. 오컬트의 관점에서 녹음물 세계에 내재하는 미스터리를 적극적으로 소환하고, 옛 것 특유의 기이한 빈티지와 '지금 있어선 안 되는 것들의 현존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실제 역사 세계와의 부조화마저 감추지 않는다. 이를테면 충돌, 결함, 불협화음, 역행, 혼란 따위를 말이다. 이로부터 발생하는 공포는 물론 우리 몫이다.
브로드캐스트는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팝스럽지만, 그럼에도 대개 고스트박스와 결이 통하는 구석이 많다. 우선 시대에 대한 관심사가 비슷하다. 60년대 영국이 그것이다. 그들의 경우에는 당대의 유로팝과 더불어 사이키델리아를 코어로 삼는다(특히 故트리시 키넌이 직접 공언하기를). 우주적 테마와 드림팝의 탈을 쓴 <The Noise Made By People>에서 그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차이점이라면 포커스 그룹이 불협화음과 파편화에 의한 '이질성'에 주목할 때, 브로드캐스트는 사운드스케이프와 키넌의 천상적인 목소리로 하여금 '환상성'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거의 문화로부터 비롯된 판타지가 코어임에도 그들은 흔히 노스탤지어나 레트로 페티시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과감하게 말하자면, 아카이빙이나 리바이벌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단지 환상성이 기여하는 탈성질, 탈형식, 그리고 세상의 진실에 관한 재고 등을 긍정할 뿐이다. 그 속에서 브로드캐스트는 철저히 유영하고 유희하는 데 온 힘을 쏟는 항해사였다.
이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고스트 박스와 상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둘 간의 유사점이 또 하나 있다. 과거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브로드캐스트 역시 유령과 영매 등에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녹음물의 세계로부터 유령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또한 같다.
진실과 해답에 의문을 던진다는 그녀의 말은 곧 가시적인 자연과 합리주의적 이성 이면에 규명하지 못한 어느 다른 세계의 존재, 즉 초자연과 신비주의에 대한 발상을 촉구하는 것으로 들린다. 마찬가지로 분명 단절된 과거의 것이기에 자연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들이 현재에 동시성을 갖고, 그에 대한 우리의 발견은 지극히 우연적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초자연성이다. 밴드는 즉흥적인 보컬 멜로디와 사이키 튠 등을 통해 이를 형상화한다.
초자연성으로부터 역시나 기이함과 공포를 느낀다. 2집 <Haha Sound>에서 체코 공포 영화 <발레리의 기이한 일주일> 등을 레퍼런스로 삼는 등 공포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탐미하는 모습도 보인다. 더 포커스 그룹이 The Vampires of Dartmoore의 <Dracula's Music Cabinet>에 영감을 얻는 것처럼.
여기에 전자음의 왜곡과 아방가르드 방법론을 통해 공포를 내재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키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서스펜스가 더 강력하다고 믿었다. 점프 스퀘어를 비롯한 자극이 많은 호러물보다 소위 '분위기로 승부하는', '보면 볼수록 뭔지 모르게 무서워지는' 심리적 호러물이 더 무섭다고 여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려나.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다고 하니까.
더 포커스 그룹과 브로드캐스트의 협업으로 공개된 <Investigate Witch Cult of the Radio Age>는 헌톨로지라는 단어가 풍기는 일차원적 이미지, 오컬트와 호러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타이틀부터 비주얼까지 모든 요소들이 작정하고 괴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풍으로 말미암은 동양식 호러가 아날로그 콜라주의 형식으로 난잡하게 도배돼 있다. 중심에는 <링>에 나올법한 처녀 귀신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컬러도 <사이렌>이나 여타 조악한 일본산 공포 게임에서 많이 본 조합이다.
종합적인 호러물 콘셉트는 대체로 80~90년대 관련 미디어 콘텐츠로부터 많은 레퍼런스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무엇을 레퍼런스로 삼았는지 알 수 없더라도, 이를 가공하고 연출하는 방식이 모두 그 시대의 빈티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비주얼과는 대조적으로 타이틀에서는 마녀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명시함으로써 서양식, 특히 아마도 유럽식 호러가 주된 영감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전에도 포커스 그룹의 모티브가 된 적이 있는 드라큘라/뱀파이어 등도 여기에 포함돼 있을 것이다.
트리시 키넌은 작품의 방향성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 해머 필름 호러 무비(역시나 드라큘라도 관련)를 연상케 하는 꿈의 모음집
- 17세기 밤 동안의 저택 내 마약/그리고 마녀 파티(수록곡 중에 "drug party"라는 트랙도 있음)
이렇게 보니 테마 자체로는 80년대보다 훨씬 거슬러 내려가야 맞다. 근대 시대 전으로까지는 가야 한다.
나는 이렇게 보고 싶다. 해머 필름의 호러물 대부분이 미라, 부두교 좀비, 드라큘라 등 이야기 내에서 훨씬 과거에 있었거나, 과거부터 있어 왔다는 설정을 지닌 존재들로 하여금, 당대 기준으로 현재에 살고 있는 존재들인 극 중 인물과 독자들에게 두려움을 유발하는 구성이다. 또한 지금은 그들의 콘텐츠들 역시 고전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호러를 연출하는 방식이 당대에는 현대적이고 최신의 기술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재는 대부분 17세기부터 20세기 초 오컬트/호러물에 근간을 두고 있지만, 이를 해석하고 본작에 체화하는 과정에서는 비디오/카세트테이프로 흔히 접하던 80~90년대의 코드를 대입했다. 세대적 차이가 있음에도 우리 역시 공포를 즐길 수 있으려면 이러한 맞춤화가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쓰인 방법론이 곧 60년대 방송음향과 전자음악의 실험 및 기술이며, 출판 및 배급이 곧 00년대 이후의 혼톨로지 커뮤니티가 되겠다. 나아가 기획은 고스트 박스, 제작은 더 포커스 그룹과 줄리안 하우스, 연출과 내레이션은 브로드캐스트가 맡음으로써, 마침내 약 50분 분량의 심령스폿 다큐멘터리 세간에 등장했다고 보면 완벽할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어느 자기 테이프가 재생하며 시작된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테이프 안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주변이 점차 변해간다거나, 혹은 뭔가를 불러일으키며 세계가 펼쳐진다. 시작을 알리는 그 소리가 테이프가 아닌 오르골처럼 느껴진다.
"The Be Colony"를 감상할 때만 해도, 그저 신비로운 동화 세계를 모험하고 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모험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는 겁보가 아니라면, 마냥 낭만적인 환상특급 열차에 탔다고만 생각하겠지. 브로드캐스트 음악에서 으레 듣던 온화한 사이키델릭 팝이 펼쳐지고 있으니까.
"how do you get along sir?"를 비롯해, 초반부까지는 약간의 으스스함을 느낄 수는 있어도 전반적으로 '끔찍함'보다는 '기묘함'이라는 인상이 주로 와닿을 것이다. 원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판타지 문학도 낯선 세계에 처음 들어설 때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 <미드소마>에서의 그토록 끔찍한 캠프도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적당히 엉뚱하면서 재미도 있는 곳이라고 착각할 뿐이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설령 당신에게 어느 노파가 "이곳에 아주 오랜 전설이 있는데 말이지..."라고 말을 건네더라도, 젊은이들이 드물게 찾아와 준 반가움에 장난 삼아 토속적인 미신을 들려준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그게 우리들에게 들이닥칠 운명에 대한 사실 그대로의 경고일 것이라고는 의심치 않으면서.
따라서 테이프에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리도 대부분 옛이야기의 파편들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중일뿐인 것처럼 들린다. 약간의 변덕이 동반되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꽤나 평화롭고 고요한 전원인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 기회에 소음으로 얼룩진 답답한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나 풍경을 만끽하고, 생각을 가다듬고 , 마음을 치유하고, 그리고 어지럽지만 나름 잔잔하게 떠다디는 옅은 소리들로부터 왠지 모를 향수에도 젖어보면 좋겠구나."
"reception/group therapy", "a quiet moment" 등의 곡 제목도 순조로운 여정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Animal Collective의 <Sung Tongs>에서 들릴 법한 프릭 포크 "i see, so i see so"에서의 기타 아르페지오와 보컬 하모니는 아예 최면에 가깝다.
하지만 "you must wake"에서 분명 무의식은 당신을 향해 경고했다. 무의식일 수도 있고 이곳에 똑같은 방식에 의해 희생당한 (그나마 당신을 위한) 망령들의 긴박한 속삭임일 수도 있다. 최면과 유혹으로부터 깨서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백마스킹과 추락하는 신호로부터 당신은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러나 당신이 깨어날 때 즈음 이미 상황은 늦었다.
"one million years ago", 노파가 말했던 전설로 돌아간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 그때의 진실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종달새나 짐승의 기괴한 울음 같은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망령의 소리일지도.
일종의 착란 현상이 끝난 이후 당신은 분명 같은 세계를 마주하고 있지만, 무엇인가 달라져있음을 인지하기 시작할 것이다. 분명 싸한 느낌이 들 테지만 말했다시피 이미 때는 늦었다.
실제로는 테이프를 처음 누른 직후부터 공포가 당신을 조용히 감싸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 진행이 너무나도 점진적이어서 당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진작에 전설의 실체에, 마녀의 저주에 들어서 있었고 빠져나오지 못했을 뿐.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온갖 소름 끼치는 소리에 농락을 당할 차례다. 대략 "oh you chatterbox"부터 그것이 시작된다. 중반부 이후로 정체 모를 유령들의 속삭임과 재잘거림, 아무런 흔적이 없음에도 자꾸만 누가 기어 오는 것처럼 들리는 발걸음, 불쾌한 노이즈, 죽음을 부르는 까마귀의 지저귐, 불규칙적인 선율과 타악 등이 당신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오르골 소리도 인트로에서 들었던 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감상일 것이며, 키넌의 목소리도 더 이상 손님으로서의 평범한 여인이 아닌, 귀신에 빙의된 희생자의 넋을 잃은 곡소리 들릴 것이다. 이미 우리가 알던 그녀는 없는 셈이다. <미드소마>에서 점점 광신도들에게 감회 돼가는 여주인공 대니 아더처럼.
이 일련의 과정이 심히 주술적이다. 사악한 마녀들에 의해 행해지는 영매 의식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ritual/looking in"이라는 곡 제목은 문자 그대로다. 당신 속에 스며든 혼령이 깨어나는 순간 가장 광란적인 소음이 펼쳐진다. 짐승인지 망령인지 모를 괴성도 발작에 훨씬 가까워진다.
이윽고 "make my sleep his song"~"what i saw"는 레퀴엠과 자장가 사이 어딘가에 있다. 적어도 세계에 들어서기 전 그녀의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기에 인간으로서의 그녀는 사실상 완전히 죽은 셈이며, 대신 그녀의 몸을 빌려 일체가 된 채 완전히 되살아난 령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이제 악독한 유령들의 공모자이자 유령 그 자체가 됐다. 마녀들은 존재의 파멸을 장송하면서 동시에 어느 존재의 부활을 찬송한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으며 반복될 것이고 그녀의 사례는 또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the be colony"는 령에 지배당한 자들의 노래였다. 똑같은 곡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느끼며, 아니 이제야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이토록 소름 끼치는 유령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
지금까지 영매에 관한 이야기 한 편을 다 읽어보았다. 비록 상상에 의존한 것이지만, 이렇게 보면 내러티브가 꽤나 순행적이다. 키넌 역시 분명 작법은 즉흥적이었지만 철저한 무작위 대신 언어적인 테두리만 무의식적인 면모를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콜라주 기법을 통해 흔히 연상하는 자동작곡, 의식의 흐름 등으로 보기에는 애매하다는 것이다.
호러를 연출하는 장치들도 꽤나 직관적이며 효과도 선명하다. 비주얼과 타이틀도 처음부터 매우 노골적으로 호러로서의 의도를 소개했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그저 잘 만든 호러 필름 한 편을 만들어 보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작품을 통해 느낀 인상은 여전히 서사나 순행이 아닌 분절과 해체이지 않은가. 어김없이 사운드 콜라주의 향연이며, 전형적인 더 포커스 그룹식 기법으로 모든 것이 구성됐다고 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해체주의와 혼란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장면을 무작위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시퀀스 단위의 플롯은 황당할 만큼 순차적이며 각 곡의 제목들이 안내하는 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충실하게 따라간다. 중요한 것은 시퀀스가 아니라 씬, 혹은 컷 단위의 연출 방식을 보아야 한다.
사운드의 핵심은 결국 샘플링에 있다. 컷 앤 페이스트 루프(loop)-찹(chop)을 통해서 음률이 연주되는 것이 아닌 음향이 재생되는 것. 두 가지의 간극과 후자의 속성으로부터 불협적인 기이함을 자아내는 법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아날로그적인 소리들을 수집한 것임에도 이것의 시작과 끝마다 지속음이 아닌 디지털식의 뚝뚝 끊기는 파형을 지니도록 한다. 믹스셋에서 패드를 이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다만 특유의 빈티지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패드가 아닌 테이프의 버튼을 일일이 눌렀다가 뗐다가 반복하는 이미지를 연상해 보자. 여기에는 키넌의 목소리도 요소 중 하나로서 포함돼 있다.
효과음뿐만 아니라 직접 연주된 악기--오르간, 기타, 피리, 하프시코드 등--들마저 녹음과 편집과 재생이라는 개념에 녹아든 이상, 그리고 그것이 콜라주를 위해 쓰이게 된 이상 분절을 의도하지 않은 음들의 분절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간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지극히 근원적인 현상이다.
단지 그것이 대중음악--특히, 90년대 서구권 팝 이래로--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 돼서, 더 이상 기이함을 느끼지 못하게 됐을 뿐이다. 샘플링이란 개념이 흔치 않던 60년대에도 방송이라는 다른 용례로서 텔레비전을 통해 워낙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톨로지는 남들이 그 성질에 익숙해져 있을 때, 오히려 그 성질의 근본을 포착하고 도로 낯설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자르고 붙인다는 인위적인 조작 행위가 자연에 침범하여 질서를 훼방함으로써 발생시키는 위화감, 또 그것이 본디 우리가 알고 있던 자연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기시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는 우리는 여기에 그나마 낙관적이고 편하게 받아들일만한 의미들을 부여하곤 했다. 레트로 퓨처리즘과 노스탤지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훨씬 근본적인 것에만 혈안이 돼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낀 위화감과 기시감은 본디 꺼림칙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니까.
많은 사운드 콜라주 아티스트들(앞으로 플런더포닉스에 속하는 이들을 포함하여)한테서도 이로부터 기이함, 일부 불편함은 충분히 동반되지만 대개 음향실험 그 자체에 최우선으로 목적을 둔다. 만약 미학이나 특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함이거든 지극히 내향적인 몽환성(Oneohtrix Point Never - Replica), 혹은 키치함(quinn - stars fell on trench), 노스탤지어(Boards of Canada - Music Has Right to Children), 로맨티시즘(Dean Blunt - Roaches 2012-2019)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곧 '두 가지 이상의 소리가 모순되고 충돌한다는 개념이 발현하는 원초적인 섬뜩함을 있는 그대로 실험하려 했던 고스트 박스의 비전이 지금에서도 연구 대상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유령이란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헌톨로지의 유래와 뉘앙스에도 가장 부합하다.
브로드캐스트의 사이키델리아는 그들의 실험에 내재될 수밖에 없는 극단성과 다소 유아적인 집요함에 짓궂은 콘셉트에 기반한 상상력과 팝 뮤직으로서의 수용성을 부여했다. 앞서 코멘트했다시피 더 포커스 그룹은 제작자이며 브로드캐스트는 내레이터(배우)이자 감독에 가깝다고 했다. 영화실험으로서의 구조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며 블룸하우스 관계자들도 좋아할 법한 웰메이드 컬트영화를 연출해 낸 것은 감독의 공이다.
브로드캐스트와의 협업과 분명한 콘셉트 덕분에 어찌 보면 줄리안 하우스의 경력 안에서도 그의 비전이 가장 엔터테인먼트의 문법에 가깝게, 그리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가장 직관적으로 구현된 작품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가장 스릴 넘치는 작품으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일상에서의 부자연스러움과 기이함이라는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오컬트물을 차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오히려 다소 관성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한 번은 그런 관성성이 효과적일 때가 있던 셈이다.
그들의 태도와 작업 방식은 혼톨로지의 기술적 특성과 일치한다. 그들에게 추적(investigate)란 역추적을 일컫는 것이다. 60년대 음향실험을 탬플릿으로 삼는 것이나 20년대 이전 고전 호러 영화를 레퍼런스로 삼는 것이나 '아카이빙'이라는 개념 하에 묶을 수 있다. 그것은 그들 음악의 편곡에 자주 쓰이는 백마스킹 기법과 같다.
이를 00년대에 재현이 아닌 해체로서 전혀 다르게 구성하는 것으로 혁신을 이루어내는 것은 곧 샘플링과 콜라주의 근본이다. 어쩌면 이에 속한 어떤 이라도 직간접적으로 퓨처리즘과 결부 지을 수 있다면, 과거에 머물러 있던 것에 동시대성 및 현존성 부여하고, 나아가 미래에 영향을 끼칠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러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이미 있던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만들고 익숙한 세계로부터 낯선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 반대로 낯선 세계로부터 기시감을 안기며 미스터리를 심화시키는 것이 가장 분명한 혼톨로지의 의의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적어도 브로드캐스트와 더 포커스 그룹은 미스터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를 작정하고 극대화시켜 호러 콘텐츠로 재탄생시켰다.
어느덧 우리는 키넌을 녹음물의 세계 안에서만, 그리고 유령으로서만 소통할 수밖에 없게 됐다. 본작의 이야기가 어쩌면 전조였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면, 내가 그녀의 영면을 두고 우스갯소리나 하려 꺼낸 하찮은 무리수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삶은 너무나도 미스터리하고 언제 우리에게 균열이 찾아올지 모르기에 누군가는 앞으로 다른 세계에서 현세를 관망하고, 남아있는 누군가가 유산을 이어받고 활동을 지속하며 생을 이어나가야 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 생과 령을 오가는 거대한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령이 실재하는 것이든 아니든 말이다. 그 누군가가 키넌과 오랜 선대들이 됐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줄리언 하우스와 그의 유산을 계승하는 후대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아직 용케 현세에 남아 즐기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