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ite for Max Brown / Jeff Parker
콘텐츠 프로필
타이틀: Suite for Max Brown
작가: Jeff Parker
발매일: 20.01.24
포맷: LP
제작: International Anthem
장르: 재즈-퓨전 / 뉴-재즈
태그: #모던시카고 #컴포지션-프로덕션 #임프로비제이션-비트메이킹 #샘플링&에디팅 #재즈-힙합퓨전 #통합적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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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Introduction
- 시카고 모더니즘
- 제프 파커
- International Anthem
1. The New Breed
- Co-Action
- Re-Action
-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속임수
2. 비트 & 임프로비제이션
3. 힙합 · 루프 · 샘플링
4. 반복 · 지속 · 변주
- Fusion Swirl
- After the Rain / Metamorphoses / Gnarciss
5. 고전 · 전통
- 고전: John Coltrane & Joe Henderson
- 전통: Lydian / Del Rio / 3 for L / Go Away
6. Theme
- 콜라주를 펼치니 그곳에 테마가
- 가족적 Tribute
7. Conclusion
AACM을 중심으로 한 시카고 재즈의 아방가르드 철학은 이성적 혁신의 추구에 있다. 이들의 태도는 재즈의 원칙과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성적 질서를 중시하는 자세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시카고의 움직임은 ‘모더니즘적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혁신은 표면적으로 탈경계를 통한 관념의 해체를 지향했지만, AACM은 프리 재즈, 비밥, 모달 재즈 등이 시도한 화성·전개·구조의 이탈이 일정한 한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대신 이들은 임프로비제이션(improvization)과 컴포지션, 연주와 레코딩, 솔로와 앙상블, 라이브와 스튜디오, 전통과 혁신, 재즈와 비(非)재즈 등 서로 대립적으로 여겨졌던 개념들의 관계를 해체하는 데 주목했다.
이러한 해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절충적이고 통합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전 연구들에서는 이를 ‘통합적 방법론(integrative methodology)’이라 명명해 왔다.
https://youtu.be/9_yqaWZAyM8?si=ckvXVdtcVaCwbWT-
AACM의 기타리스트 출신인 제프 파커(Jeff Parker)는 시카고 무브먼트의 철학을 정석적으로 계승하며, 학술적 관점에서 구조주의를 실험해 온 아티스트다.
그는 즉흥성을 중시하더라도 극단적인 기교나 우연성에 대한 의존을 지양했다. 특히 초기에는 곡의 구성적 조화와 완성도를 다소 강박적으로 추구하며, 즉흥적 해방보다는 형식적 완결성을 우선시했다. 포스트밥(post-bop)의 틀 안에서 편성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수준에 그칠 뿐, 리더로서의 존재감을 철저히 배제한 채 앙상블의 조화에 집중한 솔로 프로젝트 [Like-Coping]과 [The Relatives]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후 파커는 시카고 언더그라운드 콰르텟(Chicago Underground Quartet)과 토터즈(Tortoise)를 통해 재즈와 비(非)재즈, 특히 재즈와 포스트록(post-rock) 커뮤니티 사이를 가로지르는 실험적 교류를 이어갔다. 더 나아가, 두 그룹의 일부 멤버들을 아이소토프(Isotope 217)라는 프로젝트로 집결시켜, 훵크와 독일 일렉트로니카 등 이질적 장르를 융합하는 실험에 동참하게 했다.
요컨대, 파커는 솔로 프로젝트에서는 절제된 접근과 구조주의적 충실함을 통해 곡으로서 재즈의 전통과 전형을 탐구했으며(‘song-oriented music’ 구현), 그룹 프로젝트에서는 공동체적 실험과 교류를 통해 탈경계적이고 통합적인 방법론을 발전시켰다(‘boundary-defying music’ 구현).
그의 초기 활동은 주로 Delmark Records와 Thrill Jockey 레이블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LA)로 스튜디오를 옮기고 International Anthem에 합류하면서, Makaya McCraven의 프로젝트 세션 등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그의 음악적 실험의 방향과 태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특히, 현장 중심의 연주 및 작곡을 넘어 디지털 프로덕션과 프로그래밍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하며, 음악적 탐구의 폭을 한층 넓혀 갔다.
https://intlanthem.bandcamp.com/album/alternate-moon-cycles
https://intlanthem.bandcamp.com/album/in-the-moment
19 track album
https://intlanthem.bandcamp.com/album/in-the-moment
그는 Rob Mazurek이 [Alternate Moon Cycle]에서 신시사이저를 활용해 앰비언트(ambient)/드론(drone)에 가까운 공간적 사운드 환경을 구축한 시도, 그리고 Makaya McCraven이 [In the Moment]에서 라이브 공연 녹음물을 샘플링(sampling)·편집으로 재구성한 실험 등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한편, 시카고 시절에도 그는 DJ 활동을 병행하며 개인적인 습작 형태로 샘플을 제작해 MySpace 등에 꾸준히 업로드해 왔다. 이를 자신의 공식 프로젝트에 반영하지 않았을 뿐, 샘플링과 비트메이킹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지속적이었다.
J Dilla, Yesterday’s New Quintet(Madlib의 1인 재즈 프로젝트), A Tribe Called Quest 등 힙합 프로듀서들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그들이 샘플링을 통해 재즈를 재맥락화하는 방식을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으로 이해하고 탐구해 왔다.
이러한 탐구는 곧 International Anthem 소속 아티스트들의 선행적 실험에서 얻은 자극과 결합되어, 시카고 모더니즘과 AACM의 통합적 방법론을 새롭게 갱신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둥지를 옮긴 후 처음으로 2016년에 발표된 정규 솔로작 [The New Breed] (이하 앨범을 지칭할 때만 'New'로 약칭)는 전작들과 비교해 작업 방식 및 접근 태도, 그리고 결과물의 양상과 분위기 등 다방면에서 상이했다. 그의 퓨전 재즈(fusion-jazz)는 뉴-재즈(nu-jazz)만큼 친숙하면서도 포스트 밥보다도 신선했으며, 기존의 시카고 모더니즘에 비해 훨씬 유머러스했다.
이러한 유머러스함은 곧 한결 유연해진 작가적 태도에 직결된다. 이제는 학술적 실험에만 연연하지 않으며, 아방가르드 미학에 개인의 내러티브나 정서적 테마 (삶에 대한 성찰 및 가족을 향한 헌정) 등을 부여함으로써 서정적인 접근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앙상블에 집착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대신, 총괄 기획자로서 주도적으로 새 세션 그룹 (The New Breed; 그룹을 지칭할 때는 풀네임으로 기재)을 지휘하고 프로젝트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2020년에 발표한 후속작 [Suite for Max Brown] (이하 'Suite'로 약칭)을 통해 더욱 발전된 형태로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본고는 해당 작품 ('Suite')을 매개로 그 형태의 면면을 심층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시카고 무브먼트에서 유래한 아방가르드 재즈의 인식을 확장하는 데 어떻게 유의미하게 작용했는지 재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Though Parker collaborates with a coterie of musicians under the group name The New Breed, theirs is by no means a conventional “band” relationship.
파커(Parker)는 '더 뉴 브리드(The New Breed)'라는 그룹명으로 일련의 음악가들과 협업을 하면서도, 이들은 결코 통상적인 "밴드"의 관계가 아닙니다. - International Anthem
그렇다면 통상적인 밴드란 어떤 형식인가. 무대에서든 스튜디오에서든, 곡 작업을 위해서든 공연 연습을 위해서든 구성원들이 한 곳에 모여 실시간으로 함께 악기를 연주하면서 합을 맞춰 보아야 한다. 집단즉흥연주를 위해 모이는 재즈 앙상블이라면 이러한 프로세스는 자연스러운 것을 넘어 필히 지켜야 할 원칙이 된다.
따라서 작곡 및 아이디어 논의 과정에서는 특별하게 과정을 주도하는 멤버가 있거나, 아예 일종의 위계질서를 따르곤 할지라도, 합주를 할 때만큼은 어느 누가 됐든 수평적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상호작용할 수 있고, 연주를 '완전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통상적인 밴드 및 앙상블 관계에서는 필연적으로 Co-Action을 전제로 삼는다.]
The New Breed의 결성 목적과 구성 형태는 통상적인 밴드, 정확히는 콤보(Combo)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Co-Action을 전혀 따르지 않는 매우 특이한 형식을 취했다.
<The New Breed의 작업 프로세스>
① 제프가 기본적인 멜로디를 구상해 이를 가이드라인으로 삼는다.
② 특정 악기를 담당한 멤버 한 명만을 스튜디오에 부른다.
③ 가이드라인을 해당 멤버에게 제공한 뒤 즉흥연주를 지시한다.
④ 위 과정을 통해 각기 연주를 개별적으로 녹음한다.
⑤ 각각 녹음한 소스들을 제프가 단독으로 중첩 및 조립해 하나의 '집단즉흥연주곡'처럼 완성한다.
마치 제프가 근음이 되고, 그 위에 순차적으로 구성음을 쌓으며 화성을 구현한 셈이다. 그런데 물리적인 차원에서 냉정히 말하자면 이들은 결코 합주를 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작용은 유기적이지도, 상호적이지도 않다.
신중하게 이루어졌을 멤버들의 세션은 하나같이 그저 부품에 불과한 것처럼 명백히 소도구화되었다. 따라서, 매우 분리적이며 비선형적인 동시에 '수직적'이다. 달리 말해 현장에서 이루는 아날로그 연주마저도 기계적인 편집, 즉 디지털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
[요컨대 The New Breed는 철저히 Re-Action을 전제로 삼았다.]
비정형적인 것을 넘어 원칙에 위배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The New Breed의 작업 체계는, 그러나 꽤나 유연하고 합리적이다. 무엇보다도 제프 스스로에게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a. 총괄 기획자이자 지휘자로서의 주도권 확보]
초기 제프의 프로젝트에서 앙상블 미학과 더불어 모든 구성원들의 동등한 크레딧을 중시하던 때를 비교하면 해당 효과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기존의 철칙 역시 어디까지나 수평적 Co-Action이라는 질서를 지킨 것이기에 나름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적으로 그의 존재감을 온전히 느낄 일이 거의 없었다. 질서에 엄정한 태도가 다소 과한 수준이었다는 점도 한 몫했다. 때로는 일방적인 양보와 타협까지 감수한 탓에 오히려 그가 그저 일개 부품으로 보였을 정도다.
반면에 The New Breed에서는 동등한 지위 부여를 오히려 거부했다. 대신에 세팅부터 진행, 조율과 종합까지 설계자 자신이 전부 통제했다. 그럼에도 형식만 바뀐 것일 뿐 임프로비제이션은 충실히 수행했다. 또한 개별적인 연주자의 감각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관용적으로 반영했다.
강압적인 자세 없이도 지휘자로서 능동적으로 전 과정을 주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체계가 유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b. 더 치밀하고 효율적인 구조 구축]
철저히 도구화된 각각의 연주들은 이를테면 미디 프로그램에서 독립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채널 소스가 된 셈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각 천 퀼팅(quilting)'이 된 것이다. 이제 그는 단위가 된 각 구성들을 훨씬 자유롭게 콜라주할 수 있다.
각 소스의 발생은 분명 즉흥을 통한 것이지만 예측 불가능함에 따른 기능은 상실했다. 대신에 순전히 작가의 의도대로 알고리즘을 맞출 수 있는 로직을 획득했다. 그리고 우연 및 직관이 아닌 합리적인 인과 관계를 갖춘 로직을 통한 결합은 훨씬 응집력과 설득력을 갖게 된다.
즉, 효율성을 발휘함으로써 더욱 탄탄한 체계 하에 구조주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c. 기계적 조립으로도 생동감 있는 잼 구현]
일련의 과정은 전술했듯이 아날로그적 요소들을 디지털의 논리로 재배열하는 것이다. 제프는 이것을 '인간 대 기계 모티프(man vs machine motif)'라고 일컬었다. 즉 수단은 머신에 의존한 것이지만, 이를 통제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설계자 역할을 맡은 인간에게 있다. 또한 재료는 역시 인간의 손가락에 의해 생성된다.
즉 창작 아이디어와 수단의 활용은 인간의 감각과 이성에 의존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구현된 연주처럼 완성된다. 쉽게 말해 얼핏 들었을 때는 현장에서 구성원들끼리 유기적으로 잼을 한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짓궂게 표현하자면 얼마든지 귀를 속일 수 있게 된다. 편집을 통해서도 그 정도로 인간적이고 생동감 있는 곡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존의 라이브 합주보다 더 '기획자에게 자율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The New Breed]*가 비정형적인 체계를 취하게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프로덕션 실험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그중에서도 제프 파커는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부터 습득한 기술들을 아방가르드 재즈의 문법 안에서 실험적으로 적용하고자 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시도에는 International Anthem 소속 아티스트들과 힙합 프로듀서들의 선례가 중요한 토대가 되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DJ 활동 중 발생한 뜻밖의 해프닝이었다.
파커는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을 깊이 존경하며, “그는 나의 음악적 진화의 시금석”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어느 날 믹스셋(mix-set) 퍼포먼스 중 그는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의 첫 악장 Acknowledgement”에, Thrill Jockey 시절 동료였던 일본 IDM 프로듀서 노부카즈 타케무 (Nobukazu Takemura)의 곡(구체적인 제목은 미공개)을 매시업 형태로 결합해 보았다.
그 결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두 곡이 완벽한 싱크업(synch-up)을 이루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비록 그때의 녹음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스피리추얼 재즈의 신성함과 타케무라 특유의 동화적 전자음이 어우러지며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현상은, 즉흥 연주로 구현된 추상적 프리 재즈가 시퀀싱을 통해 생성된 비트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친화성과 리드미컬함을 획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결국 이러한 경험은 파커로 하여금, 자신이 꾸준히 연습해 오던 샘플링과 시퀀싱 기법을 활용해 기존의 퓨전 재즈를 넘어서는 창의적 크로스오버를 시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인간 대 기계’라는 모티프 간의 맥락적 연관성과 AACM의 통합적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접근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기존에 연습해 오던 샘플링과 시퀀싱(sequencing)을 적절히 활용해 기존의 퓨전 재즈보다 창의적인 크로스오버, 인간 대 기계 모티프 간 맥락적 연결, 통합적 방법론에 대한 접근성 고취 등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https://intlanthem.bandcamp.com/track/build-a-nest-feat-ruby-parker
파커는 [The New Breed]의 인트로 "Executive Life”의 리듬과 아웃트로 “Cliché”의 보컬 코러스(그의 딸 루비 파커가 담당)를 [Suite for Max Brown]의 인트로 “Build a Nest”에 함축적으로 재구성하며, 전작의 모티프를 잇는 방식으로 새 앨범의 포문을 열었다.
이러한 ‘함축’은 장르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곡은 1990년대 동부 힙합의 묵직한 드럼 루프와 1970년대 소울의 따뜻한 정서를 융합함으로써, 흑인 음악 특유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특히 찬송의 서두를 연상시키는 짧은 피아노 인트로는 이 곡을 일종의 커뮤니티적 정서로 귀결시키며, 파커는 이를 하나의 무드보드이자 사운드 팔레트로 삼아 그 위에 재즈의 문법을 대입해 나간다.
곡의 구조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반복적인 드럼 패턴, 루비의 보컬, 샘플링으로 구현된 백 코러스, 구획을 전환하는 피아노, 그리고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일렉트릭 기타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다.
a. 드럼과 코러스가 루프(loop)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드럼은 힙합 특유의 친숙하고 에너제틱한 리듬감을 제공하고, 코러스는 샘플링 기법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며 음악적 맥락의 층위를 더한다.
b. 일렉트릭 기타는 보컬 멜로디를 섬세하게 받쳐주는 동시에, 릭(lick)을 통해 즉흥성과 재즈적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유롭게 그 역할을 넘나 든다.
이러한 리듬의 반복은 구조적 안정감과 대중음악적 친화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기초적 베이스로 작용한다. 그 위에서 파커는 재즈의 문법, 특히 기타의 어법을 자유롭게 배치하며, 반복된 레이어 사이에 단 하나의 대비적 릭만을 삽입해도 즉흥성을 부각할 수 있다.
결국 파커는 샘플링이라는 단일한 기법만으로도 장르 간의 경계를 유연하게 통합하고, 앞서의 노부카즈 타케무라 × 콜트레인 매시업(mash-up) 사례처럼 서로 다른 영역을 절묘하게 동기화함으로써, 재즈와 힙합·소울·일렉트로니카 커뮤니티 간의 연대적 맥락을 창출해냈다.
https://intlanthem.bandcamp.com/track/cmon-now
제프는 그루브를 그대로 이어가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Otis Redding의 "The Happy Song(Dum Dum)"의 일부를 샘플링하여 25초짜리 인터루드(interlude)를 후속 배치했다.
사운드 클립처럼 굉장히 짧게 연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샘플링에 대해 습작하던 시절의 부산물들을 재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단편을 장난치듯 조작해 보고픈 매우 즉각적인 충동의 실천이었다.
이때의 충동을 두고 제프는 '프로듀서의 귀(producer's ear)'라는 워드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고 해명했다. 즉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호기심의 성격이 강한 감각의 영역이었다.
"감각에 의존해 충동을 실현하는 즉각적인 소리"라는 점에서, 어쩌면 또 다른 임프로비제이션으로 재고해 볼만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현을 통해 약간이나마 체험한 결과물은 어떠한 기교나 변주도 없는 단순한 형태일 뿐이었다. 루핑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방식으로 힙합의 작법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충실하게 드러냈으며, 샘플링이 앨범 전반에 걸친 작업 체계의 토대라는 것을 간결하게 암시했다.
https://intlanthem.bandcamp.com/track/fusion-swirl
1·2번 트랙에서 루프(loop)가 그루브를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면, 3번 트랙 “Fusion Swirl”에서는 그 기능이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이 곡에서 루프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정성을 통해 청자를 끌어당기는 서스펜스 장치로 작용한다.
이때에도 파커 특유의 속임수(trickery)가 발휘된다. 겉으로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베이스 라인임에도, 무심코 들으면 마치 그가 현장에서 미묘한 변주를 더하며 현란한 주법을 구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는 그의 애드립이 별도의 트랙으로 녹음된 뒤 리버브(reverb)와 필터링(filtering)을 거쳐 공간적 깊이를 부여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즉흥 연주의 생생함을 교묘하게 재현한다.
이처럼 연주와 재생 사이의 경계에 놓인 기묘한 장난은, 무조적 배경음과 함께 병행된다. 여기에는 서스테인(sustain)과 드론이 맞물려 작동하며, 일종의 음향적 긴장을 지속시키는 공간적 장막을 형성한다. 앞서 Rob Mazurek의 *[Alternate Moon Cycle]*에서 확인했던 전자음 기반의 드론 구성 방식을 염두에 두면, 파커가 그 선례를 직접적으로 참조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Suite for Max Brown]에서의 앰비언트/드론은 단순한 인용을 넘어선, 보다 독창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것은 곧 ‘터널’의 역할을 한다. 이 드론은 특정 공간이나 사운드 세계로 이동하게 하는 음향적 통로로 작동하며, 그 대표적 전례로 포스트하드코어(post-hardcore) 밴드 Unwound의 “We Invent You”를 떠올릴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Unwound의 드론이 앨범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일방통행의 입구였다면, 파커의 드론은 여러 세계를 양방향으로 왕래할 수 있는 징검다리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https://eremiterecords.bandcamp.com/track/slight-freedom
그렇게 아프리카풍 댄스 세계에 흠뻑 몸을 담그던 중 몽환적인 워프로 빠져들어 부유하듯 흘러간다. 그러다가 전혀 다른 세계에 입성하게 되는데, 그곳은 필터링을 거친 어쿠스틱 기타 솔로만이 입장객을 반기는 포크, 혹은 블루스의 세계다.
잔잔함과 고요함이 더 강한 세계이지만 이곳은 분명 [slight Freedom](스포티파이 등 공식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청취 불가)의 첫 곡에 연출된 세계와 비슷하다. [Slight]는 오로지 제프의 독주로만 이루어진 유일한 프로젝트다. 또한 [New]나 [Suite]와 다르게 오버더빙 없이 라이브로만 연주된 메인 리프 위에 샘플 루프와 드론을 부가적으로 레이어링하는 방식을 취했다.
어째서 앙상블은 물론 세션 그룹조차(The New Breed는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음) 없이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기억을 "Fusion Swirl"에 재소환했을까. 이는 본 트랙의 크레딧을 확인함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fusion Swirl
Jeff Parker - electric guitar, bass guitar, samplers, percussion, vocals
긴장을 반복하는 원초적 댄스 세계를 창조하고, 지속적인 앰비언트 통로를 마련해, 블루스 세계로의 변주까지 타이틀 그대로 이 놀라운 일련의 퓨전 소용돌이를 어떠한 협업도 없이 전부 그 혼자서 이루어냈다. 여러 악기 중에 '샘플러'가 눈에 보일 것이다. 그 외 밴드 세션에 버금가는 악기 각각의 독주가 한 가지의 기술로 완전하고도 자연스러운 합일을 이루었다.
그 합일은 곧 5분 간의 결코 짧지 않은 기행문을 써냈다. 요컨대 댄스와 블루스, 서로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서사적으로 연결해 드라마적 콘텍스트를 재구성한 것이다.
본작에서 블루스로의 연결은 곧 서정의 영역으로의 진입과 다르지 않다. 힙합이 발라드로, 리듬이 멜로디로, 그루브가 무드로, 실험이 정서로, 기술적 혁신이 심미적 예술로 — 모든 흐름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After the Rain"은 본래 The New Breed 투어 중 밴드 레퍼토리로 연주되던 곡으로, 이례적으로 라이브 연주와 앙상블의 매력에 충실한 작품이다. 제프와 시카고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미학이 이 곡에서는 비교적 온전히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양식으로 단순히 회귀한 결과가 아니다. 앞선 일련의 흐름을 통해 서사적 관점을 부여함으로써, 현재의 방향성과 과거에 따르던 질서 간의 맥락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적 접근은 편집(샘플링 및 오버더빙)과 편곡(라이브 및 순수 연주)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시도이기도 하다.
두 상이한 방법론의 경계를 매끄럽게 잇고, 여정에 가까운 전개로 청자를 이끈 뒤, 다시금 앰비언트적 통로 ─ “Metamorphoses”를 통해 ─ 다음 목적지로 안내한다. 이번에는 Korg-MS20 신시사이저와 시퀀서를 적극 활용해 고조된 분위기를 형성한다.
https://intlanthem.bandcamp.com/track/gnarciss
이번에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다시금 끈적한 리듬이 반복되는 힙합의 ‘비트’다. 즉, 우리는 되돌아왔고, 일련의 여정은 일종의 왕복이었다.
“Gnarciss”는 리드미컬한 트랙이 앰비언트 간주곡 바로 뒤, 그리고 앨범의 중심부에 배치된 덕분에 전체 흐름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Build A Nest”와 달리 이번에는 샘플링과 ‘수직적 Re-Action’ 방식이 결합된 분리적 합주의 결과물을 마주하게 된다.
이번 트랙에서는 일렉트릭 기타가 간헐적으로 독주를 펼치는 데 그치지 않고, 색소폰과 트럼펫 등이 합세해 총 여섯 명이 앙상블을 이루며 밀도 높은 연주를 완성한다.
결국 이 곡의 핵심은 힙합에서 비롯된 샘플링 및 루프 프로덕션이 재즈의 앙상블 원칙과 결합하여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한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콘텍스트의 흐름이 이 지점에서 한층 극적이고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https://youtu.be/Q0W4jrKFIpk?si=f0GWNtHACQkn5aun
“Metamorphoses”를 징검다리로 삼아 이어지는 양측의 트랙, “After the Rain”과 “Gnarciss”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곡 모두 커버곡이라는 점이다. 전자는 존 콜트레인의 동명곡을, 후자는 조 헨더슨(Joe Henderson)의 “Black Narcissus”를 원곡으로 삼았다. 다만 “Gnarciss”의 경우 코드 진행이나 구성상 차이가 크며, 실질적으로는 샘플링에 가깝다. 그럼에도 저작권상의 이유로 작곡자 본인 역시 이를 명목상 커버곡으로 인정하고 있다.
(a) “After the Rain”은 콜트레인이 아방가르드 재즈의 통달 과정을 라이브 앨범 형식으로 담아낸 [Impressions]의 수록곡이다. 앨범은 이미 익숙해진 모달 재즈의 어법을 기반으로, 프리 재즈 특유의 불협화음과 구조적 해체를 통한 긴장감, 그리고 연주 기량을 전면에 드러낸다.
그러나 “After the Rain”은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정석적이고 서정적인 곡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시에 콜트레인의 연주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잔뜩 긴장된 신경과 근육을 정서적으로 이완시키는 일종의 선물처럼 다가온다. 제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곡은 구조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친밀한 감상을 가능케 하는 작품이다.
제프의 재해석은 바로 그 서정성과 친밀함에 주목한 결과다. 초기의 작업들이 고전을 구조주의적·모더니즘적 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훨씬 유연하고 관대한 태도로 접근한다. 그는 불필요한 각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원곡의 형태를 충실히 재현했다. 이러한 충실함은 ‘구조’보다 ‘분위기’와 ‘정서’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결과 그의 해석은 더욱 인간적이고, 한층 온화한 울림을 남긴다.
https://youtu.be/JoHqlxQ076M?si=LLmcvoT3KXDOWPNb
(b) 이제 “Black Narcissus”를 살펴보자. 이 곡이 수록된 앨범 [Power to the People]은 하드 밥(hard-bop)이 포스트 밥, 재즈 퓨전, 프리 재즈 등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분기하던 과도기의 미학을 한데 집약한 작품이다. 조 헨더슨은 재즈 퓨전의 감각을 흡수하면서도 전자 악기를 절제된 방식으로 도입해, 혁신과 균형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시카고 모더니즘의 형성과 전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록곡들은 이러한 앨범의 미학을 반영하듯 다채로운 악기가 얽혀 복잡하면서도 풍성한 하모니를 이룬다. 특히 “Black Narcissus”는 모달 재즈와 퓨전 재즈, 그리고 포스트 밥의 경계에 걸친 곡으로, 말 그대로 하이브리드형 트랙이라 할 수 있다.
제프의 커버 버전 또한 여러 면에서 하이브리드하다. 힙합, 전자음악, 현대 재즈가 한데 섞여 있으며, 앞서 언급했듯 라이브 연주와 디지털 프로세싱, 임프로비제이션과 샘플링의 경계를 해체한다.
이 곡이 제작된 시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Gnarciss”는 후술할 “Go Away”와 함께 [Suite] 세션의 초기에 구상된 곡으로, [New]에서 보여준 혁신적 방향성으로 완전히 이행하기 직전의 과도기에 해당한다. 즉, 기존의 구조주의적 접근에서 새로운 실험으로 옮겨가는 전환의 시기에 태어난 셈이다.
결과적으로 “Gnarciss”는 원곡이 지닌 통합적 관점과 시대적 과도기의 배경을 함께 흡수하여, 이를 샘플링이라는 현대적 언어로 재구현한 곡이다. 그는 현재의 방법론을 통해 1960년대 이후 재즈의 역사를 하나씩 다시 고찰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앞서 살펴본 두 커버곡은 고전이라는 사료를 바탕으로 이제부터 '전통과 역사의 재탐구'로 연구 주제를 옮기기 위해 수행한 밑작업에 해당한다. 앨범의 2부(편의상 분류하자면)에서는 Lydian부터 Go Away까지 각 주제별로 [Suite]의 방법론을 적용해 보는 실험을 진행한다.
https://intlanthem.bandcamp.com/track/lydian
I. 모드
타이틀에서부터 리디안 모드, 곧 모달 재즈의 탐구를 전면에 내세운 트랙임이 명확하다. 판데이로(pandeiro)가 리듬을 단독으로 지탱하는 가운데, 베이스와 일렉트릭 기타가 모드의 구조를 따라 차례로 성실하게 진행하며 선율을 형성한다. 그 위로 신시사이저가 겹겹이 쌓이고, 이러한 패턴이 약 55초간 반복된다.
음향적 조율을 통해 리디안 모드가 본래 지닌 ‘부유하는 감각’에 미묘한 SF적 질감이 덧입혀진다. 이를테면 가상공간 속에 재현된 원시 세계, 혹은 버추얼 환경에서 열리는 화성학 수업을 연상케 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질감과 구조적 차이가 주로 미디(MIDI) 프로그래밍을 통해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순수한 연주만으로 완성된 곡이 아니라, 녹음된 사운드를 루핑하고 시퀀싱된 신시사이저 음으로 세밀하게 포인트를 준 결과물이다. 즉, 연주의 관점에서 구현된 모드를 프로그래밍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시도라 할 수 있다.
https://intlanthem.bandcamp.com/track/del-rio
II. 아프리카
본 트랙은 MS-20 신시사이저로 조성된 몽환적인 환경음, 샘플러를 통해 루핑된 드럼 비트, 그리고 폴 브라이언(Paul Bryan)의 베이스라인으로 구성된 미니멀한 구조 위에서 전개된다. 이윽고 자장가(lullaby)를 연상시키는 맑은 소리가 등장하며, 곡이 탐구하고자 한 지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소리를 구현한 악기는 오르골이나 글로켄슈필(glockenspiel)이 아니라, 아프리카 기원의 체명악기 음비라(mbira)(*위 사진 참고)다. 제프가 이 트랙에서 탐구하려 한 것은 재즈의 민족적 뿌리다. 구체적으로, 프로그래밍을 통해 생성된 현대적 사운드 속에 전통을 넘어 재즈의 원초적 기원을 통합하려는 시도다.
이 원초적 울림을 통해 트랙은 연말의 잔잔한 파티처럼 평온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사이 절제된 제프의 일렉트릭 기타 리프가 등장해 여운을 그리듯 곡을 감싸고, 즉흥연주를 통해 재즈 모더니즘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마지막에는 이 모든 요소가 샘플러 루프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듯, 부드럽게 페이드 아웃된다.
https://intlanthem.bandcamp.com/track/3-for-l
III. 잼
이 곡은 빌 에반스(Bill Evans) 스타일의 3/4박자 왈츠 리듬 위에 느릿한 블루스적 정서를 섞어 구성되었다. 제프는 제이 벨러로즈(Jay Bellerose)와 듀엣을 이루며 차분한 호흡을 맞춘다. 드럼은 부드럽게 스윙하고, MS-20 신시사이저는 안정된 화음을 제공하며, 기타는 온화하고 멜로디컬한 잼을 펼쳐낸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는 결국 오버더빙(overdubbing)을 통해 형성된 최종적 레이어의 결과물이다. 이는 아마도 가장 교묘하게 청자를 속이는 ‘속임수’일 것이다. 마치 어두운 바에서 조용히 연주하는 장면을 그대로 포착한 듯 들리지만, 실상은 정교하게 조립된 구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프는 분명 ‘잼’을 하고 있다. 그것도 이 앨범 전체에서 가장 정석적이고 전통적인 템포와 뉘앙스로 말이다.
https://youtu.be/feX-SiCT1rE?si=6B57ORUQpboCQLZN
IV. 밥
“Go Away”는 1부에서의 방법론적 실험과 2부에서의 전통 재탐구가 가장 명확하게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곡이다. “Fusion Swirl” 특유의 리드미컬한 루프와 앰비언트 구성을 그대로 재소환하면서도, 이번에는 반복이 아닌 변칙과 변주의 향연으로 전개된다.
이번 트랙에서 제프는 모든 악기를 홀로 담당하지 않는다. 베이스는 폴 브라이언(Paul Bryan), 드럼은 [In the Moment]으로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마카야 맥크레이븐(Makaya McCraven), 그리고 일렉트릭 기타와 애드립 코러스는 제프 자신이 맡았다.
본작의 다수 트랙과 마찬가지로 ‘조각 천 퀼팅(patchwork quilting)’의 제작 방식을 따르지만, 제프의 솔로 연주만큼은 더블 기타 편성으로 거의 한 번에 녹음되었다. 그는 각각의 리프를 부메랑 루퍼(BoomeRang looper)로 기록한 뒤, 이를 분리 출력하여 다층적 사운드를 완성했다.
이 곡에서의 연주는 그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힐 만큼 화려한 기교를 선보인다. 다만 여기에 댄스 그루브가 더해지며, 곡의 질감은 훵크(funk)나 매스 록(math rock)에 가까운 활기를 띤다. 다시 말해, 프로그래밍을 통한 정교한 계산 속에서도 그는 공공연히 하드 밥의 언어를 펼쳐 보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Suite]를 실험과 기술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제프 파커의 대안적 접근은 시카고 모더니즘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도, 뉴 재즈 혹은 현대 LA 재즈 씬에 견줄 만큼 친숙하고 유연한 형태로 확장된다. 이는 기존 포스트 밥이나 재즈적 시도보다 훨씬 신선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서론에서 언급한 [New Breed]와도 깊은 시사점을 공유한다.
그 유연함과 실용성 덕분에 제프는 더 이상 앙상블의 한 부품으로 머물지 않고, 온전한 솔로이자 리더로 자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지식한 학술가가 아니라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제 제프는 자신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리하여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를 얻었고, 성찰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깊은 정서와 서사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Fusion Swirl"의 서사적 전개는 이러한 자기 변화의 흐름을 함의한다. 그는 마침내 수필가처럼 음악 속에 삶을 반영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쓴 이야기는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제프가 구축한 통합적 방법론에서 ‘통합’이란 단지 예술 사조나 음악적 조류의 융합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카고를 비롯한 더 넓은 공동체, 나아가 민족적 가치까지 포괄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그 혁신적인 콜라주 퍼포먼스를 단순한 실험으로만 바라보다가, 마침내 각각의 조각이 하나의 거대한 사진으로 모여드는 순간—그 이미지가 Kendrick Lamar의 [To Pimp A Butterfly]의 커버 아트워크였음을 깨닫는다면, 그때 느낄 감정을 상상해 보라. 바로 그 지점이 [Suite]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자, 이 모든 혁신이 도달한 최종의 성과다.
다만 그가 완성한 사진은 거창한 역사적 상징이 아닌, 가족의 평범한 한 장면일 뿐이다. [Suite]의 앨범 커버는 그의 어머니 맥신 브라운(Maxine Brown)이 19세이던 시절 찍은 사진이다. 그것은 민족성을 현대적으로 복각하려는 노골적인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그저 가족에게 바치는 헌정(tribute)에 가깝다.
[New Breed]가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에야 공개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세월의 얼룩과 바래진 색, 손끝에 닿는 흔적 속에 담긴 그녀의 시간을 존중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감정이 모든 트랙의 플롯에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은 아니다. 그는 가족뿐 아니라 자신의 변화, 동료들과의 교감, 시카고 모더니즘의 전통, 그리고 자신이 구축한 통합적 방법론의 확장 가능성 등 여러 주제를 함께 다뤄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된다. 바로 ‘유대’다. 자신의 이성과 실존적 자아가 조화를 이루고, 과거의 역사로부터 현대 음악 씬과의 연결점을 찾아내며, 통합에 새로운 민족적 가치를 부여하고, 개인의 일상 속 보편적 감정을 통해 공동체적 연대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모든 것이 유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렇기에 본작에는 분명한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일직선의 플롯이 아니라, 콜라주 형식으로 짜인 서사다. 여러 이야기의 조각들이 하나의 콘텍스트를 이루며,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가족을 향한 이야기가 놓인다. 이를 대표하는 트랙이 바로 딸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빌린 “Build A Nest,” 어머니가 즐겨 들으셨던 “After the Rain,” 그리고 앨범의 아웃트로인 “Max Brown”이다.
https://youtu.be/121ubnR4PzU?si=KnYqd8kNZmHlqspZ
"Max Brown"은 본작의 비선형적 내러티브와 기법에 완결성과 함축성을 기여한다. 기술적으로 보나, 구조적으로 보나, 주제적으로 보나 아웃트로는 정점이다. 10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복합적인 앙상블과 하이브리드 작곡 방식의 표현형, 다채로운 악기 활용 등을 압축했다. 존 콜트레인과 조 헨더슨, 제이 딜라, YNQ, AACQ가 이 한 곳에 있다.
그러면서 동명의 타이틀을 통해 이 모든 요소는 어쨌든 궁극적으로 "내 어머니를 그리기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 집에서 어머니께서 편하게 청취하실 수 있는 감수성으로 갈무리된다. 어머니께서도 분명 이 곡을 통해 가장 먼저 느낄 것은 아들의 보답과 헌신이리라.
이는 영상을 통해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 혹은 여러분들의 가족 이야기로 확장된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부모일 것이다. 그들은 같은 음악으로 춤을 추며 때로는 화면 너머의 당신을 바라본다. 개인에서 공동체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주제를 재맥락화한다.
통합은 곧 화합이 된다. 재즈는 곧 당신에게 유대를 선물한다.
AACM의 정신에 따라 구조와 앙상블에 집착하며 재즈의 탈경계를 위해 골몰하던 제프 파커는 힙합에서 영감을 받아 왔다. 그리고 샘플링을 홀로 연습해 왔다. 그 샘플링에 관한 선행 사례로부터 힌트를 얻어 마침내 전적으로 자신만의 권한과 체계에 따른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게 됐다.
그 방법론으로 하여금 장르, 기술, 사운드, 커뮤니티 등 기존의 통합적 방법론 보다 훨씬 광범위한 차원에서 경계를 허물고 맥락적으로 재조합할 수 있음을 알렸다.
그것은 매우 실용적이었으며, 덕분에 창작자에게 혁신가로서, 나아가 한 개인이자 가족 구성원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그렇게 그는 학술과 보편 사회를 망라하는 작가로 거듭날 수도 있었다.
시카고에서 발발한 모더니즘의 확장에 대해 [New]와 [Suite]는 분명 하나의 지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New]가 가능성이었다면, [Suite]는 완성에 가깝다. 이전에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했던 서사까지 비로소 완결을 이루었다.
수단에 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강박 속에 미처 보지 못했던 길이 틔인다. 그 길이 서로 다른 세계에 있던 많은 요소들, 혹은 우리 사람들이 아울러 함께 걷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음악을 위한 발전이기도, 그 음악으로 하나 되는 커뮤니티를 위한 발전이기도 하다.
※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jinyajim)에서 AACM에 관해 짧은 포스팅으로 에필로그를 계획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