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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산

이말산 산행기

by 하영일

'이말산'은 궁녀들의 공동묘지로 알려진 산이다.

궁에서 생을 마친 궁녀들의 이곳에 많이 묻혔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 사방 십리 안쪽, 이른바 성저십리(城底十里)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다.

이말산은 한양에서 너무 멀지도 않으면서 무악재와 박석고개에 의해 차단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조선 초부터 집단 매장지가 많았다. 특히 나이 들어 출궁 한 궁녀들이 많이 살았으니, 이 지역에 무덤이 많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궁녀들은 대개 10살 전후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다 죽을 때가 되어 출궁 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로 시작해, 오랜 시간 동안 충성과 노력을 쌓으면 궁녀로서 최고 직위인 종 5품 상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예외적으로 왕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입고 벼락 출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모든 궁녀는 왕의 여자이므로 결혼을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궁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며 왕실의 일상적인 운영을 도왔다.


특히 상궁은 궁녀들 중에서 경험과 신뢰를 바탕으로 선발되었으며, 그 직위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


상궁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인 제조상궁은 전체 궁녀를 지휘하고 통솔했으며, 감찰상궁은 궁녀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보모상궁은 왕자와 공주의 양육을 담당했다.


특히 이말산에 묻힌 상궁 임 씨(1635 ~ 1709)는 조선 인조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네 명의 임금을 모신 보모상궁이었다. 13살에 궁녀로 입궁하여 랜 세월 동안 왕실을 위해 헌신한 그녀의 이야기는 당시 궁녀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임상궁 이야기를 통해 궁녀들과 그녀가 묻힌 이말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오늘 이곳을 찾았다.

구파발역 2번 출구 나오바로 궁녀길 언덕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 그런지 산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가벼운 산책 복장을 한 사람도 있지만, 큰 배낭을 멘 장거리 산행 차림의 등산객들도 많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을 출발점으로 북한산 산행을 나서는 사람들이리라.


산으로 올라왔지만 무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공동묘지 산으로 알고 왔는데, 전쟁을 위한 요새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궁녀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잡풀 무성한 벙커와 방공호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다가온다. 몇 걸음 더 걸어가니, 어느덧 산 정상부 능선에 도달했다.


산중에는 배드민턴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곳곳에 '산스장'이라고 불리는 헬스장도 잘 조성되어 있다. 나무 사이로 북한산의 웅장한 줄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거대한 산줄기가 앞을 막고 있어 이말산의 양기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곳이 공동묘지로 적합한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능선길을 따라가며 궁녀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궁녀는 어떤 여성인지부터 궁녀로 선발되는 절차 등 궁에서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궁녀들에 대한 설명 안내판을 모두 지났지만 상궁 무덤처럼 생긴 것은 하나도 만날 수 없었다. 아직 더 가야 나오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능선을 계속 걷는다. 2킬로미터가 지나도록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이쪽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지나가는 분에게 여쭤보니 "이말산 정상은 뒤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궁이나 내시들의 무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다시 되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발길을 돌린다. 이번에는 능선길이 아닌 능선 아래로 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래쪽 길로 내려오자, 인터넷에서 보았던 무덤 석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 산 능선에 무덤을 조성할 일은 없었고, 무덤들은 이말산 남쪽 사면을 따라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의 풍파에 비문들이 모두 지워진 석물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이말산 양지바른 곳 전체가 공동묘지였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눈에 보이는 석물들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지만, 임상궁 묘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석물은 있으나,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상궁 무덤 중에 지금까지 신원이 밝혀진 것이 세 명 있는데, 임상궁 무덤이 그중 하나라고 한다.


임상궁 무덤을 찾지 못해 애태우며, 산비탈을 이리저리 헤매는 사이 어느새 능선 끝자락까지 왔다. 묘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이말산을 훑고 다니는 것은, 넓디넓은 공동묘지에서 김서방 무덤 찾는 격이었다. 내가 준비 없이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이었다.


이제 임상궁 무덤 찾기는 포기하고, 정상목이라도 확인을 하자는 생각을 하며 건너편 봉우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걸음만에 이말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착한다. 평평한 정상에는 콘크리트 벙커가 몇 개 자리하고 있으며, 한쪽에는 "이말산 133 m"라고 적힌 표지목이 서 있다.

산 정상에 세워진 일반적인 정상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넓은 나무판에 적힌 글씨는 마치 시골학교 총동창회 사무실 간판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뒷면에는 "이말산에 방치된 영혼들의 넋을 위로하며 도성을 바라보게 세우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평생을 몸 담았던 한양도성 쪽을 바라보며 쓸쓸히 잠든 수많은 궁녀들의 혼(魂)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 이 표지목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임상궁은 장희빈과 숙빈 최씨와 같은 같은 시대에 궁녀로 일했지만, 그들과 달리 왕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아들이 왕위에 올라 역사의 중심에 선 장희빈과 숙빈 최씨의 인생은 화려했다. 반면 임상궁은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며 긴 세월을 견뎌냈다.


궁중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과 살벌한 음모를 가까이에서 목격했으면서도, 그녀는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며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모상궁으로서 왕자와 공주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보모상궁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죽은 뒤, 왕으로부터 친히 비문을 하사 받았다. 임상궁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헌신과 성실이 깊이 배어 있다. 그녀를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깨닫는 기회가 될 것이다.


비록 오늘 산행에서 임상궁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소풍오듯 환생했기를 바란다.

이번 생(生)은 궁궐에 갇힌 삶이 아니라, 세상 여기저기 마음껏 돌아다니며 재미난 여정을 보내기를 기대해본다.


추운 겨울날 이말산 궁녀길을 걸으며, 조선시대 궁녀들과 함께한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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