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가끔 먹는다.
피치 못할 상황(단체로 먹거나 물놀이를 했거나 등의 특수한 상황) 아니면 라면을 굳이 찾아 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1년 중 한 손에 꼽는 며칠은 라면이 그렇게 먹고 싶다.
그럴 때 먹는 (국물 있는) 라면이 저 컵라면.
첫 만남이 맞는지 불확실하다만, 살아 있는 기억에 의존한다면 아마도 초등학생 때이다.
학교 수업 끝나면 피아노 학원에 갔는데 피아노만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피아노 배우고 연습하는 건 당연하고 원장 선생님이 학원 꼬꼬마들 식사를 차려주셨다.
피아노집과 어린이집의 결합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피아노 교습 및 연습시간 외에 학생인 어린이들이 모여 밥을 먹는 시간이 있었다.
? 물음표가 뜰 법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간 피아노 학원이었기에 피아노 학원은 다 이런 줄 알았다.
이사 가고 다른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내 첫 피아노 학원이 독특한 거였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얼굴을 봤지만,
원장 선생님 얼굴은 정확하게 기억난다.
목소리도, 헤어 스타일도, 옷 취향까지.
좋은 쪽으로 기억에 남은 분이다.
애정을 가지고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고
식사 역시 (규모가 꽤 있는 학원임에도)
본인이 직접 준비하며 매번 챙기셨다.
선생님 웃는 표정이 바로 떠오르는 것 보니
아이들에게 웃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나 보다.
나는 피아노 학원에서 밥을 먹을 때 막내라인이었고, 한 살에서 세 살 정도 더 많은 언니들 사이에 섞여 먹을 때도 있었다.
수요일은 다 같이 학교 수업 빨리 끝나는 날이니까 학원에서 밥을 먹는 인원이 유독 많았고 다른 요일은 학년마다 수업 종료 시간대가 달라 또래끼리 밥을 먹는 요일도 있었다.
이때 사진 속 컵라면을 처음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빠가 라면을 아주 좋아하는데 엄마가 애들 주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설렁탕면, 짜파게티 정도는 해 달라고 말해서 먹을 수 있었지만 빨간 국물 라면은 대체로 금지였다.
아무튼 나보다 몇 년 더 산 언니들이 원장 선생님에게 조르며 컵라면을 먹자고 했다.
그 날이 하늘도 돕는 날인지 마침 쌀이 모자라 모든 인원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학원에서의 식사는 영양 골고루 갖추고 푸짐해서 든든한 한 상이라기보다 한창 뛰어놀고 에너지 뿜는 초딩들에게 간식 개념으로 가볍게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컵라면을 처음 먹게 됐다.
처음 먹은 컵라면이 저 컵라면이라니 단번에 최애 컵라면을 만날 줄이야!
부동의 마음 속 1위, 아니 0위 컵라면이 저 컵라면이다.
라면 시장에도 국물 있는 라면, 국물 없는 라면, 국물도 뽀얀 국물이 있는 라면 등 다양한 변천사가 있다.
상대적으로 횟수는 많지 않아도 종류만 따지면 나 역시 한국인답게(?) 다양한 라면을 먹어 봤다.
봉지라면 뿐 아니라 컵라면도 마찬가지다.
열 가지가 훨씬 넘는 컵라면을 먹어 보았는데 저 컵라면이 왕좌를 내내 지키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따뜻한 국물 있는 게 먹고 싶었는데 베란다에 저 컵라면이 딱 보여서 아침부터 라면을 먹었다.
꼬들꼬들한 면!!! 여전하구나.
해를 거듭할 수록 몸이 좋아하면 입맛도 거기에 맞춰지는 걸로 설정이 바뀌면서 라면 자체에 대한 마음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마음 속 1위 라면은 ㄴㅅ ㅇㄱㅈ 사발면이다.
(광고 아님, 홍보 아님)
어린이들이 피아노 학원 안쪽 방에 앉아 라면을 후루룩 같이 먹는데 눈이 저절로 커졌다.
‘이게 그 유명한 인스턴트의 맛이라는 거구나...!’
충격을 받을 정도로 새롭고 맛있었다.
인생 선배 몇 살 언니들은 뚜껑을 뜯더니 뚝딱 고깔모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러더니 그걸 들고 라면을 거기에 넣어 후루룩 먹는 거다.
그걸 지켜 보던 막내들 표정 변화
•_• ——> ㅇ_ㅇ
(우와...*_*)
“원장 선생님!!! 저도 저렇게 먹고 싶어요!”
갑자기 분위기 종이접기 시간...?
뚜껑으로 그릇 만들어 주신다고 갑자기 분주해 지셨다.
이 날은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억에 남는 날이다.
1. 컵라면이라는 걸 먹었는데 봉지라면보다 훨씬 맛있었고
2. 언니들은 멋있게 일회용 그릇을 뚝딱 만들어 라면을 호로록 편하고 깔끔하게 먹었다.
두 가지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날.
끓는 물을 붓고 라면이 익길 몇 분 기다리던 중에 문득 먼 옛날... 그때가 떠올랐다.
집에서 컵라면 못 먹으니까 친구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원장 선생님께 우리 컵라면 자주 먹자고 건의(?)했던 기억도 나고.
참 소박하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