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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환점에서 멈춰버린 글쓰기

근속 25주년의 특이점, 일단 다시 써보기로 한다

by 시간주인

5월 31일.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 반환점을 돌면서 나의 글쓰기는 멈췄다.

'내가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야.' 뭔가 근사한 핑계를 찾으려고 했는데 찾을 수 없다. 글쓰기 습관이 몸에 착상되기 전에 본능이 이긴 거다. 내가 아직 담배를 못 끊는 것처럼. 나는 아직 글쓰기를 즐기는 단계가 아니니까.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한 번이 무섭지 그다음은 쉽다.

한 달 살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못 가본 관광지를 가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체력 배터리가 약한 아내와 근교여행까지 가다 보니 내가 할 일이 많아졌다.

이 상황은 글쓰기를 패스할 좋은 핑계가 됐고 연재 한 번을 건너뛰게 되었다. 한 번이 두 번, 세 번, 그러다 3달이 넘게 지나버린 거다.

아주 가끔 라이크와 구독알림이 나를 찔렀지만 한번 멈춘 글쓰기는 웬만한 자극에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럼 왜 지금 시점에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오늘은 평소와는 몇 가지 다름이 있는 날이었다.

오전 근속 25주년 행사에서 지금까지는 박수를 쳤다면 오늘은 박수를 받았다는 것.

싱숭생숭한 마음에 점심때 청계천 산책을 했는데 갑자기 비가 왔다는 것. (사실 산책을 즐기지 않는다)

비를 피하려 카페에 들어갔다는 것. (평상시 같으면 뛰어서 사무실 갔다)

꽤 오랫동안 '비멍'에 빠졌다는 것. (보통 유튜브를 본다)



'25년이라니... 회사생활 참 오래도 했네'

생각의 시작은 오늘 기념식이었다. 그러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몇 년 전부터 자발적 은퇴를 준비하면서 뭔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 무지개를 품었던 청년은 이제 무색, 무미, 무취의 아저씨가 돼 있었다.

조금 이른 은퇴를 해서 '시간부자가' 아니라 하고 싶은걸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시간주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데만 온 힘을 쏟다 보니 '감정 세포'가 다 죽어 버렸고 이를 다시 되살려야 했다. 그 첫 번째가 나를 탐구하는 글쓰기였다.


"하나, 둘, 셋에 파이팅 하세요" 근속 25주년 기념촬영에 환하게 웃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도 입꼬리를 열심히 올렸다. 하지만 마음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마지막, 이별 같은 단어가 찍혔을 거다. 나는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이방인 같았다. 이 순간 마음속에서 '멈춘 글쓰기'가 꿈틀 했다.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가 3달이나 지난 시점.

연재를 계속해야 할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됐지만 일단 쓰기로 했다.

오늘 미루면 또 본능이 이길거란걸 안다.




참, 글을 다 쓰고 나니 생각이 났다. 나의 글쓰기 딜레마.

나는 입찰제안서를 쓰면서 항상 평가받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경쟁은 치열했고 보이지 않은 손도 있었다. 영혼을 바쳐 제안서를 써도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평가받은 삶을 살았지만 은퇴 후에는 평가받는 삶과는 이별하고 싶다.


그래서 딜레마다.

'나를 위한 글쓰기'와 '읽히기 위한 글쓰기' 사이에서.

나를 위한 글쓰기면 브런치가 아니라 일기장에만 적어도 되는 게 아닐까?


얼마 전 고도원 작가님의 '누구든 글쓰기' 브라토크에 다녀왔다. 보라토크 신청 때 이 딜레마를 사전질의로 썼는데 운 좋게 사회자가 작가님께 물어주었다. '수백 개 질문 중에서 내가 뽑혔다고?' 난 만세를 외쳤다. 드디어 답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님은 질문과는 다른 말씀을 하셨고 나의 기대는 허망하게 사라졌다.


나는 아직 글쓰기 딜레마를 풀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멈췄던 글쓰기를 다시 해보기로 했다.

가다 보면 답이 보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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