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근현대사와 백색테러

미국이 세운 비델라 정부와 콘토드 작전 그리고 민간인 학살

by 김남기
unnamed.jpg 아르헨티나의 위치: 글쓴이는 2010년 중학교 3학년 당시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축구전을 보며 이 나라의 이름을 알게 됐다.

아르헨티나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떠올릴 것이다. 지난 2022년 월드컵 우승 국가가 아르헨티나이기도 하고, 전설적인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가 아르헨티나 선수이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개인적으로 기억이 나는 건 아마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었다. 당시 마라도나가 이끈 아르헨티나 선수단이 한국과의 경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는데, 그가 감독으로써 모습이 비춰졌기 때문이다.

8awzgFbZy-h3fZBVHMI78N4fxw70TpltepSCHfLPNd0.jpg 차베스와 카스트로를 만난 아르헨티나 전 축구 감독 마라도나: 세계적인 축구선수인 그는 정치적으론 친사회주의 반미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마라도나가 반미성향의 좌파였다는 사실은 국내에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라도나는 생전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하고 각별한 사이였으며, 2005년에는 직접 반미시위에도 참가한 인물이다.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유명한 축구선수가 반미주의자라는 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르헨티나의 현대사를 보면,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아르헨티나는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에르네스토 체게바라(Ernest Che Guevara)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체게바라는 어린 시절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랐으며, 대학생 시절 아르헨티나를 떠나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아르헨티나 또한 사회주의자들을 적잖게 배출해낸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pimg_7234051032960131.jpg 체게바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혁명가 체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실 라틴아메리카에게 있어 미국은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존재다.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자행한 착취와 폭력 그리고 학살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장 아르헨티나 옆에 붙어 있는 칠레만 하더라도 미국이 내세운 피노체트 군사 독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탄압받고 학살당했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그리 못살지 않는 아르헨티나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쳤으며,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미국의 폭력이 그 정점을 찍었다. 오늘은 아르헨티나가 겪은 비극의 현대사를 보고자 한다.


아르헨티나는 16세기 초반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이 지역에 백인 이민자들이 유럽으로부터 대량으로 유입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됐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대공황으로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는 목축업과 농업이 발달하여 쇠고기와 곡물수출에 의존하여 부를 쌓을 수 있었는데, 1946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10위에 달하는 나라였다. 물론 아르헨티나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남미로 도주한 나치 망명자들이 적잖이 존재했으며, 이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로서 겪은 고질적인 저임금 고착취 문제와 노동자 문제 등 고질적인 병폐도 결코 작지 않았다. 지주와 소작농의 불평등한 관계 및 이로 인한 착취도 심각했다.

399_peron.jpg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페론의 경우 페론주의라 불리는 사상적 흐름이 있다. 그러나 해당 사상은 좌파와 우파적 성격이 같이 섞여 있다.

또한 미국발 경제 대공황 이후 재정 적자 및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빈부격차 문제와 더불어 군부 정치 개입도 겪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3년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을 주축으로 한 청년 장교들이 집권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은 임금인상과 주 60시간 노동 단축, 동일 노동의 남녀 차별 폐지와 해고 노동자의 복직 등을 요구한 노동자의 파업 요구를 수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페론은 아르헨티나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으며, 당연한 얘기지만 이러한 페론의 모습을 미국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페론 정권은 노조, 군부, 가톨릭, 여성, 중산층 등 광범위한 사회부문에서 지지를 받았으며, 1947년부터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병원, 학교, 고아원, 양로원 건립을 추진했다. 특히 페론의 아내 에비타가 이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페론은 5개년 경제계획을 통해 국민 총생산이 29% 가량 상승시켰다. 많은 혜택이 노동자에게 돌아갔으며, 이러한 점에서 페론은 아르헨티나인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c-102-800x445.jpg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개입 사례

그러나 페론은 1955년 아르헨티나에서 군부에 의해 축출되기도 했으며, 18년 후인 1973년 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할 수 있었지만, 1년 뒤인 1974년 사망했다. 또한 1970년대부터 아르헨티나는 사실상 국가가 무정부 상태에 빠졌고, 1975년 석유파동의 여파로 수출이 감소하고 외환위기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1년 뒤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페론 정부는 이 쿠데타로 무너졌다. 1976년 3월 미국이 후원하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고, 군인 출신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Jorge Rafael Videla)가 집권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비델라 정권은 아르헨티나를 소위 신자유주의적 개방으로 이끌었다. 비델라의 군사정권은 새로운 외국인 투자법을 도입했고, 기업 인수와 금융 투자를 촉진했으며, 정부 통제로부터의 환율을 자율화했다. 이 군사정권은 말 그대로 다국적 기업, 금융자본,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대기업들과 단단한 동맹을 형성했으며, 이 동맹은 1980년대 내내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또한 이 동맹세력은 1960년대 아르헨티나의 실질적인 산업성장의 특징이었던 수입대체 전략을 역전시켰으며, 외채를 폭증시켰고, 생산체제를 만성적인 탈산업화의 길로 이끌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비델라 정권으로부터 이어진 아르헨티나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국가가 사기업의 외채 부담을 떠맡는다. 사기업들은 계속해서 외채를 추가적으로 들여오고, 그 사이 국가는 사유화 정책을 통해서 공기업들을 팔아치움으로써 국내외의 사적 독점기업으로 하여금 금융상의 이윤지대를 취하게 한다. 그리고 국가는 임금, 사회적 서비스, 그리고 공공투자를 희생시켜 금융상의 잉여를 만들어내도록 국민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외채의 부담을 전체 경제, 특히 근로대중들에게 전가한다.”

491950104_9578120798900174_9148519612909938203_n.jpg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1976년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게 된 비델라는 아르헨티나를 반공 독재 국가로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탄압하고 구금하고 학살했다.

비델라 군사정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반공주의와 그에 따른 백색테러였다. 실제로 비델라는 “고문이나 살인과 같은 행위들을 공산주의, 체 게바라주의, 비(非)기독교적 생활양식으로부터 아르헨티나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 조치”로 정당화했다. 또한 군대, 경찰, 정보기관, 아르헨티나 반공동맹과 같은 준군사조직들이 좌익 게릴라를 소탕하는 데 앞장서게 했고, 페론파를 비롯한 반정부단체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492010149_9578120885566832_6614832599638454617_n.jpg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는 비델라 정권의 경찰들.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은 1978년에 쓴 『미국 대외정책론(The Washing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에 따르면, 비델라 정권에서 48,500명의 죄수를 포함하여 최소 4,000명 이상이 실종됐고, 4,500명이 사망했다는 장 피에르 클레크의 공식통계를 인용했으며, 최소 1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아르헨티나 언론인들이 인용하는 수치 또한 인정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의 친미 쿠데타 다음 해인 1977년에는 최소 5,000명에서 6,000명의 정치범이 있는 것으로 국제사면위원회가 확인했으며, “고문이 광범위하게 그리고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최소 2,000~5,000명의 사람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도 추산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행해진 끔찍한 고문에 대해선 당시 뉴욕타임스가 19살의 한 아르헨티나 여성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유괴된 다음날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문실이라고 불렀던 방으로 인도됐다. 그곳에서 민간인 복장의 사람들이 우리를 심문했는데 자백을 받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고문을 사용했다. 고문의 형태는 다양했다. 몽둥이와 주먹, 발길질로 때린다든지 물이나 오줌 속에 익사할 지경까지 집어넣는다든지, 입에나 눈, 코, 가슴, 생식기, 음경, 발, 손과 같이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라 피카나(전기 막대기)를 사용 한다든지 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손과 발을 철사줄로 결박한 다음 전류가 흐르는 철사침대에 우리를 묶어놓기도 하고 더한 고통을 주기 위해 그 위에 물을 뿌려댔다. 이러한 방법들은 그들이 말하는바 어떤 활동을 강제 자백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는데. 그 활동은 대개 군부가 조작한 것이었다.”

81jD12cfimL._AC_UF1000,1000_QL80_.jpg 아르헨티나의 친미 군사독재에 관한 서적.

사실 아르헨티나 비델라 정권의 이런 극악무도한 백색테러는 1970년대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전개한 반공작전인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의 일부이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중남미 5개국 친미 우익독재국가와 함께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삼으며 콘도르 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은 미국 CIA의 적극적인 물절, 기술적 지원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각국에선 시민들을 감시 및 체포 그리고 구금 및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다.


콘도르 작전으로 최소 5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최소 7,000명에서 3만 명 이상의 아르헨티나인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콘도르 작전으로 대략 40만 명이 고문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30만 명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군부독재의 무자비한 백색테러와 학살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들 중 적잖은 이들이 탈출하다 잡혀 죽기도 했다. 이러한 학살에 대해 전직 아르헨티나 해군 장교 출신인 아돌포 실링고는 다음과 같은 말까지 했다.


“아르헨티나 군대가 나치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


놀랍게도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한 쿠데타로 탄생한 이 비델라 정권을 위해 지원을 지속했다. 미국은 세계은행을 비롯하여 미주지역개발은행,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차관기구들이 자금을 지원하도록 도왔으며, 미국 스스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카터 행정부와 레이건 행정부에서 행해진 일이며, 한 고위관리는 “펜타곤은 미국이 아르헨티나 공군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미국은 아르헨티나의 친미 군사독재 정권을 지원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백색테러와 인권유린은 아르헨티나인들 대다수에게 미국과 친미 군사정권에 큰 반감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미국의 라오스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