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포스트모더니즘 - 서사의 붕괴 [1]

‘거대한 이야기’ 대신 파편화된 서사, 아이러니적 태도

by 엠알

"게임은 더 이상 진지하지 않다"


‘큰 서사’의 몰락과 게임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1979년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큰 서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서사’란 단순히 방대한 줄거리의 이야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신뢰해온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의미 체계를 말한다. 계몽주의의 이성,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민족주의의 역사, 기독교적 구원의 내러티브 같은 것들이다. 모더니즘적 예술은 이러한 ‘큰 서사’를 전제하거나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는 달랐다. 더 이상 진보나 구원의 보편적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었고, 대신 파편화된 작은 이야기들, 아이러니, 상대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게임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1980~90년대 게임은 기술적으로 단순했지만, 이야기의 지향은 오히려 거대했다. 고전 RPG들은 세상을 구하는 영웅담을 반복했고, 전략 게임은 문명의 흥망성쇠를 압축해 보여주었다. 심지어 아케이드 슈팅 게임조차 ‘인류를 위협하는 외계 세력으로부터 지구를 지킨다’는 식의 대서사를 전제로 했다. 당시 유저들은 비교적 단순한 인터랙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큰 틀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저들의 인식은 달라졌다. 더 이상 장대한 영웅 서사를 무조건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거대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가 퍼지고 있었고, 게임 문화 내부에서도 반복되는 영웅 서사는 식상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유저가 점점 더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소비자가 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에 대한 거리두기가 일어났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많은 작품들은 여전히 ‘영웅 서사’를 흉내 내지만, 그 진지함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는다. 《보더랜드》 시리즈가 좋은 사례다. 표면적으로는 행성 판도라를 무대로 한 모험과 전투의 이야기지만, 게임 전체는 아이러니와 농담으로 가득하다. 악역은 우스꽝스럽게 과장되고, 영웅의 행보는 농담과 패러디 속에서 희화화된다. 유저는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기보다는, 게임의 세계를 풍자와 냉소의 대상으로 소비한다. 즉, 서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진지한 의미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장식품이자 농담거리에 가깝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특정 게임의 연출이 아니라, 포스트모던 문화 전반의 징후다. 영화, 소설, 만화에서도 더 이상 ‘진지한 영웅’은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反)영웅, 허무주의적 캐릭터, 자기 비하적 서사가 대중에게 더 큰 호응을 얻는다. 게임은 그 특성상 더 직접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유저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고 조작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큰 서사가 몰락한 자리에 남은 것은, 파편화된 경험과 아이러니적 태도다.


결국 게임 속 ‘큰 서사’의 몰락은 단순히 서사의 변화가 아니라, 유저 경험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더 이상 유저는 절대적 가치와 보편적 의미를 믿고 몰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게임을 즐기면서도 그 서사를 농담거리로 소비하고, 커뮤니티에서는 아이러니와 밈으로 재가공한다. 모더니즘의 진지함은 해체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파편화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게임은 거대한 의미를 주는 대신, 끊임없이 조각내고, 재활용하며,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유저를 붙잡는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게임이 보여주는 첫 번째 징후다. 큰 서사는 무너졌고, 이제 유저는 진지한 이야기보다 조각난 세계 속에서 아이러니를 즐기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게임과 젠더 - 게임은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