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동양 철학서를 읽기 시작했다. 일본 근대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와 조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의 『경 철학』이다. 니시다는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등 서양 철학의 사유를 흡수하면서 불교의 심성론을 융합해 자신만의 사상을 세웠다. 그는 인간 인식의 근원적 상태를 ‘순수경험’이라 불렀고, 이를 통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기 이전의 통합적 의식을 탐구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곧 그의 철학이 이전에 읽었던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표현의 틀과 언어만 달랐을 뿐, 인간의 내면과 진리를 탐구하려는 근본적 열망은 동일했다.
퇴계 이황의 사상 또한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는 고려 후기 문인 권근으로부터 이어진 성리학 전통을 계승해 조선의 도덕적 이념을 정립했다. 성리학, 곧 주자학은 공자와 맹자의 유교 정신을 잇는 학문으로, 인간의 마음과 우주의 이치를 탐구한다. 쉽게 말하면 도덕 철학이며, 칸트의 도덕 철학이나 기독교의 윤리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퇴계는 세속적 성공에만 집착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훈구파를 비판했고, 왕과 백성 모두가 하늘의 법칙에 따라 마음을 수양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경(敬)’은 단순히 예를 다하는 태도가 아니라,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런히 하여 욕망을 절제하고 이치(理)의 질서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는 내면의 훈련이었다. 이 수양의 길은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의 정결함, 성령의 인도에 따른 자기 절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과도 연결된다. 퇴계의 ‘성·심·정(性·心·情)’의 구조와 ‘사단칠정’ 논변은 인간 내면의 선한 본성과 감정의 조화를 다룬다. 그것은 곧 양심의 철학이며,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내면 구조’라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본질적 과제는 같다. 자신의 욕망을 이기고, 내면의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며, 선과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퇴계가 ‘경’을 강조했듯, 신앙인은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그 길을 걸어간다.
인류는 외모나 언어는 달라도 모두 하나의 종, 호모 사피엔스이다. 민족과 문화의 차이는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보편적 이성과 도덕의 원칙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이 각 문화의 언어로 다양하게 드러날 뿐이다. 칸트는 이를 ‘선험적 구조’라 불렀고, 퇴계는 ‘리(理)’라 했으며, 니시다는 ‘순수경험’이라 했다. 명칭은 다르지만, 그 핵심은 ‘양심의 빛’이다. 그 빛은 사람마다, 문명마다 다른 언어와 상징으로 드러나지만 근본 원리는 하나이다.
나는 이 깨달음을 통해 종교적 배타주의와 다원주의의 양극단을 동시에 넘어서는 길을 보았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죄 사함, 구원의 진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외의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배울 것이 많다. 도덕과 양심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미 다양한 문화 속에 다른 이름으로 심겨져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보편성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이성의 증거다.
퇴계가 말한 ‘경’의 정신은 오늘날의 신앙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단순한 조심이나 경건의 태도가 아니라, 마음을 한곳에 모아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자세이다. 기도는 경의 실천이며,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경의 사색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다스리는 자세로 구현된다. 이렇게 동양의 수양과 서양의 신앙이 만나는 자리에는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과 신적 의지가 조화를 이룬다.
철학을 공부하며 나는 다시금 하나의 진리를 확인했다. 진리는 단 하나이지만,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언어와 상징은 다르지만, 모든 위대한 전통은 인간의 내면에서 선을 향한 동일한 울림을 발견했다. 그 울림은 양심의 소리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안에 새겨진 흔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구원의 진리를 고백하지만, 동시에 모든 참된 철학과 종교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배운다. 진리를 향한 길은 다르지만, 진리는 언제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