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으로부터 받은 오늘의 지혜는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다시 묻는다.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
3차원의 공간 인식에 익숙한 우리는, 종종 신을 우주의 저 너머, 멀리 떨어진 초월적 존재로 가정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물질세계에 국한한 감각의 연장에 불과하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다.
물론, 칸트가 말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인식의 틀은 인간의 인식 작용에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없이 어떤 것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들 조차도 신이 창조한 질서이며, 중력의 법칙처럼 설명이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명한 전제일 뿐이다.
이제 영적 세계의 작동 원리를 단순화하여 사유해 보자.
우리는 눈을 감고 관념의 세계에서 상상력과 직관을 통해 다양한 상황을 구성해 낼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가 꿈을 꾸는 경험과 유사하다.
한순간 거대한 우주를 상상하다가도 곧바로 현실의 장면으로 전환할 수 있고, 과거와 미래, 현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인식은 여전히 시간과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경계는 느슨해지고 벽은 허물어진다. 이것이 곧 영적 세계의 방식이다.
물리적 육신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은 이와 같이 자유롭게 시공을 넘나 든다.
그리고 이때 무한히 먼 곳은 동시에 무한히 깊은 내면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우주이며, 신은 그 우주의 중심에 계신다.
신께 다가가기 위해 나는 밖으로 향하는 눈을 거두고, 내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향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길은 곧고 단순하거나 자연스럽지 않다.
내 영혼이 신께 다가가는 여정은 시간과 치열한 노력을 요하는 과정이며, 무심히 흐르거나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여정을 위해 나는 먼저 육신의 두꺼운 장막을 한 겹씩, 깊이 파고들며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 장막이란 욕망, 욕정, 시기, 질투, 분노, 허영, 두려움, 비겁함 등 — 죄로부터 비롯된 마음의 왜곡된 형상들이다.
신의 지혜와 평온함, 아름다운 마음 상태에 이르기 위해, 나는 반드시 이성의 빛을 들고 그 장막 속을 파고들어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정신적 고행이며, 깊은 영적 전투이다.
내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 통찰에 따르면, 절대적 고요와 침묵 속에서 적어도 30분에서 1시간 정도 치열하게 사고하지 않으면 이 장막은 쉽게 뚫리지 않는다.
그러하여 욕적인 마음을 통과해 들어갈 때, 나는 비로소 예수께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샘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그 물을 마시는 순간, 마음은 큰 위로와 깊은 인식을 얻게 된다.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고, 죄로부터 용서를 체험하며, 교만에서 겸손으로 이동하게 된다.
세상의 풍파를 이길 힘과 지혜, 용기를 얻게 되며, 세상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서서히 생겨난다.
물론 이 과정은 결코 단순하거나 빠르지 않다.
그러나 신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의 희열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나는 이 경험에 긍정적으로 중독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약이나 술, 도박, 성적 분출처럼 육신과 영혼을 파괴하는 중독과는 다르다.
신에게 중독되는 것이며 나의 상처 입은 욕신과 왜곡된 영혼을 오히려 회복시키는 길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다시, 내면 우주의 중심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치열하게 내려간다.
신은 멀리 있지 않다.
그분은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