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사랑함이 믿음을 무너뜨릴 때

by 신아르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돈 자체가 악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악의 뿌리가 되어 결국 믿음에서 떠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이 말씀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히려 더 날카로운 도전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돈 없이 살 수 없는 구조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외면한 신앙은 오래가지 못한다. 체제를 완전히 거부하고 세상을 떠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며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 말씀을 단순히 “돈을 멀리하라”는 도덕적 명령으로만 읽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태도와 마음의 방향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깊은 분별을 요구한다.

어쩌면 초기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서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들이 청교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노동과 축적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돈으로 이동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 결과가 청교도 정신이었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였다. 신앙은 현실을 떠나지 않았고, 현실은 신앙의 통제를 받으려 했다.

성경이 말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우리의 마음 상태는 감사와 만족, 그리고 자족이어야 한다. 이 마음이야말로 성령이 이끄는 마음이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평안의 상태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어도 마음이 늘 불안하고, 더 가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이미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가깝다.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돈이 마음을 지배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돈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신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성실히 일하고, 절제하며 모으고, 지혜롭게 투자하여 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 자체를 죄악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균형을 잃은 태도다. 교회를 운영하고, 선한 일을 감당하고, 선교와 구제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돈은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앙인은 손을 놓고 세상을 바라만 볼 수 없다.

문제는 언제나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벌고, 왜 벌며, 어디에 쓰느냐’다. 돈을 버는 과정은 성실하고 정직해야 하며, 법과 윤리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라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에, 벌어들인 돈의 일부를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누리는 데 사용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기독교인은 잉여의 돈 앞에서 책임을 진다. 그 돈이 오직 개인의 안락과 향락, 쾌락을 위해서만 사용된다면, 그의 신앙은 말과 생각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하지만, 삶에서는 그 믿음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이미 공허해진 것이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의 열매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돈이 없을 때는 유혹도 적다. 그러나 돈을 소유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지속적인 시험대 위에 올라선다. 앞에 놓인 마시멜로를 지금 당장 먹을 것인가, 아니면 더 큰 가치를 위해 기다릴 것인가의 문제와 같다. 더 근본적인 시험은 이것이다. 나의 안전과 미래를 정말로 주님께 맡기고 있는가, 아니면 돈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유혹에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가.

돈은 분명 큰 힘과 가능성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마음을 가장 쉽게 사로잡는 우상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영혼에게 큰 부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감사와 자족의 뿌리가 깊이 내려진 영혼에게 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된다.

결국 문제는 돈이 아니라 마음이다. 돈을 손에 쥐되, 마음까지 내어주지 않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가장 어려운, 그러나 가장 중요한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