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은 기적을 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더 직접적이고 초월적인 방식으로 듣고 싶어 한다. 눈에 보이는 표적, 귀에 들리는 음성, 상식을 넘어서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기대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우리는 초월을 갈망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가장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오기를 원한다.
과연 무엇이 더 초월적인가.
귀에 들리는 소리인가, 아니면 내면을 흔드는 양심의 음성인가.
눈에 보이는 사건인가, 아니면 선과 악을 분별하며 자기 욕망을 넘어서는 인간 존재의 깊이인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닮아 있다. 몸을 가지고, 본능을 가지고,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느낄 수 있고, 기억할 수 있고, 시간을 따라 경험을 축적하며 하나의 자아를 형성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생각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인식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윤리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단순히 유익을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를 묻는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구별하고,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며, 때로는 자기 본능을 거슬러 더 선한 길을 선택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 앞에서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에 거의 놀라지 않는다.
너무 오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도, 감정도, 기억도, 자아도, 양심도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 있었기에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바로 그 익숙함이 우리의 눈을 가린다. 매일 사용한다고 해서 신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신비일수록 일상 속에 숨어 있다.
우리는 물질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몸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생명은 생리학적 메커니즘 속에서 유지된다.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감각 역시 물리 법칙 안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감각 가능한 세계를 현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현실 안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사건들을 기적이라 부른다. 바다가 갈라지고, 병이 낫고, 음성이 들리고, 바람이 불고, 땅이 흔들리는 사건들 말이다. 물론 그것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드러내는 놀라운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감각 가능한 세계 안에서 나타난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몸으로 경험된다.
이 점에서 오히려 더 깊은 질문이 생긴다.
사람들이 초자연적이라고 부르는 외적 기적이 사실은 감각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진다면, 진짜 더 깊은 경이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답이 인간 존재의 내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은 여전히 신비롭다.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안다.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의 나를 이어 간다.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자신을 반성하며, 충동을 평가하고, 선택을 숙고한다. 더 나아가 나는 “무엇이 나에게 유익한가”를 넘어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다. 인간은 단순히 반응하지 않는다. 인간은 의미를 묻고, 책임을 느끼고, 도덕적으로 괴로워한다. 이 모든 것은 너무 익숙해서 쉽게 지나치지만, 사실 인간 존재 안에 있는 가장 깊은 경이의 흔적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외부에서 들려오는 특별한 소리로 상상한다. 그러나 소리가 공기의 진동을 통해 귀에 전달되는 것은 지극히 물리적인 방식이다. 만일 하나님이 꼭 그런 방식으로만 말씀하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초월자를 오히려 지나치게 감각의 틀 안에 가두는 셈이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 곧 양심과 분별과 정화된 이성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훨씬 더 하나님답고 인간 존재에도 어울리는 방식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수용기로 만들지 않으셨다.
생각하고, 기억하고, 갈등하고,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자리도 바로 그 존재 구조 안이어야 한다. 욕망보다 선을 택하려는 자리, 자기 이익보다 옳음을 무겁게 여기는 자리, 편안함보다 진실을 선택하는 자리, 미움보다 사랑을 고민하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듣는다.
물론 여기에는 함정도 있다.
내면의 모든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다. 욕망도 말하고, 두려움도 말하고, 자기합리화도 말한다. 그래서 분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분별의 과정 자체가 영적 사건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자기 욕망을 의심하고, 양심을 살피고, 무엇이 더 선한지 묻고,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보려 할 때, 이미 그 삶 안에는 초월의 흔적이 작동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기적을 너무 멀리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사건, 강렬한 체험, 외적으로 놀라운 표적을 기적이라 부르며 그것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내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게 살기 위해 고민한다는 것. 내가 욕망과 싸울 수 있다는 것. 내가 선과 악을 분별하고, 자기중심성을 넘어 사랑을 선택하려 애쓴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존재라는 것. 바로 이것이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깊은 기적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귀에 직접 들리는 방식은 감각 세계의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에, 양심에, 분별에, 윤리적 결단의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방식은 더 깊은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을 바꾸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며, 입증되기보다 살아내어지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초월자 하나님께 가장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기적을 보는 눈부터 바뀌어야 한다.
기적은 반드시 바다를 가르는 사건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 기적은 내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따르려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욕망보다 진실을 택하려는 싸움 속에서 일어난다. 자기중심성을 넘어 타인을 사랑하려는 결단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게 말씀하신다.
가장 큰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그것에 너무 익숙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