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o Jan 19. 2024

25. 그렇게 나는 여자 동거인이 생겼다.

온두라스 | 우연은 끝났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배정된 숙소 침대에 눕자 비로소 긴장이 풀리며 새삼 내가 정말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얄미운 면도 있지만, 과연 Yuto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스쿠버다이빙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지, 그리고 그 가족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지.

새삼 여행에 만난 인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스쿠버다이빙을 등록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해프닝이 있었다.


나는 Yuto가 꼬셔서 이곳 온두라스까지 왔고, Yuto 본인이 샵까지 다 알아보고 여기까지 왔다.

함께 스쿠버다이빙을 등록하려 했는데, Yuto가 거절당했다.

어제 맞은 비가 잘못 됐는지 Yuto가 감기에 심하게 걸려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Yuto는 감기가 낫고, 컨디션을 회복하고 나서 스쿠버다이빙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같은 숙소를 사용하다 나까지 감기에 옮으면 둘 다 수업에 지장이 생기기에 Yuto는 감기가 나아 수업을 등록하기 전까지 따로 방을 잡고 지내게 됐다.

같이 하자고 해서 따라온 사람은 무사히 등록했는데, 정작 본인은 등록조차 못하다니!

친구 따라 오디션 구경 갔다가 친구는 떨어지고 내가 캐스팅된 꼴이 아닌가.


그렇게 나 홀로 수업을 등록하고, 홀로 방 배정을 받았다.




다시 돌아와서.

짐도 대충 풀어놓은 상태에서 침대에 반쯤 기대어 지난 여행에서 만난 인연들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아직 불과 몇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낯섦.

처음 느낀 낯섦이 무색해질 정도로 금방 친해진 사람들.

그리고 각자의 여행이 있기에 필연적인 이별.


여행에 익숙해진다는 말의 다른 말은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짧은 시간이지만 벌써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겪었다.

지금은 또 누구와 어디서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에 대한 궁금함과 그리움으로 조금 감수성이 촉촉해지려던 찰나, 노크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는 동안 머물렀던 숙소. Yuto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이런 결과를 만들 줄이야.



?


아까 나를 방으로 안내해 줬던 스태프가 들어온다. 어떤 낯선 여자와 함께. 심지어 여기선 보기 드문 아시아인.


??


나는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내 방엔 무슨 일인가요?)

스태프가 말해준다. 앞으로 같은 방을 쓰게 될 사람이라고. 심지어 한국인.


???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니 구석에 침대 하나가 더 있다.

맥도널드에서 밤을 지새우고 Yuto의 해프닝도 있어 심신이 너무 지쳐있던 나머지, 문 열자마자 보이는 침대에 바로 다이빙하느라 방안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던 것이다.

스태프의 말로는 원래 2인용 숙소이고, 마침 국적이 같아서 같이 배정했단다.

한창 흐름 타서 촉촉해질 뻔했던 나의 감수성은 급속도로 건조되었다.


사실, 남성/여성 구분되어 도미토리를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인 한국과 달리 외국에는 혼성 도미토리가 많다.

또한 성별이 구분되어 있는 도미토리와 혼성 도미토리 중 혼성 도미토리의 가격이 더 저렴한 곳이 대부분이며, 그러한 이유로 나 또한 계속 혼성 도미토리를 이용해 왔었다.

다만, 나는 지금까지 여행자가 많이 방문하지 않는 곳을 다녀 투숙객이 적은 곳이었거나 홈스테이, 반복된 우연 등의 연쇄로 계속 혼자 아니면 동성인 남자들과 계속 룸메이트를 해왔다.

그래서 처음 나타난 이성의 룸메이트가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하물며 그게 2인실에서! 심지어 한국인이라니!


유교의 가르침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7살 이후에 이부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가 한 침대 한 이불을 같이 쓰는 것은 아니지만, 뼛속까지 유교보이였던 나였기에(진짜로.) 낯선 여성과 단 둘이 한 공간에서 함께 머문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했다.

리고 무엇보다 나보다 더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할 저 사람이 걱정이었다.


영겁의 시간이 걸릴 만큼 수많은 생각과 걱정과 번뇌(?)와 고민했던 것과 달리 실제론 찰나의 시간이 흘렀으리라.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여자와 홀로 평화로운 스태프의 짧은 대치는 스태프가 지(?) 할 말만 하고(라 쓰고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급 폭탄을 투하하고'라고 읽는다.) 유유히 방을 떠나며 끝이 났다.


남미를 여행 중이라던 J누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띨라 섬에 도착해 같은 다이브샵에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기 위해 등록했다고 한다. 나와 똑같은 어드밴스드 오픈워터까지.

심지어 내일 시작한다는 것까지 똑같았다.

다행인 점은 어느 정도 여행에 익숙한 누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의 나이 차이가 10살 정도 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J누나는 나와의 생활에 크게 불편함이나 불만이 없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나만 불편해하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아 나도 그냥 마음 편히 생활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여자 동거인이 생겼다.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었더니, 따사로운 오후 햇빛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어디에나 온기는 존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24. 그대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도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